장가용동기를 생각 하면서
Memmorial for Kayong Chang
우리의 영원한 친구
장가용동문이
2008년 1월 19일 새벽
고이 눈을 감았습니다

말년에 지병으로
고통 받아가며 하던 투병생활을
영원히 접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아쉬움 속에 먼 길을 떠났습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아픔과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삶을 찾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안실: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6호실
발인: 2008년 1월 22일 화요일

김진호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네.

그동안 오래 투병하던 장가용 동문이 오늘 하늘나라로 갔네.

미국에 있는 친구들 멀리서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기 바라네.



영안실: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  6호실

발인: 2008년1월22일(화)



이재흥.

장가용 동문을 보내면서

오늘 아침 50 여년 같이 살아 온 친구가 멀리 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명복을 빌면서 게일(Gaelic) 기도를 적어 보냅니다.


May the road rise up to meet you.

May the wind be always at your back.

May the sun shine warm upon your face;

The rains fall soft upon your fields

And until we meet again,

May God hold you in the palm of His hand.


조은순



***   장가용 동기생이 오랜 투병생활을 청산하고 평화와

     안녕만이 깃든 하늘나라로 먼저 간 것은 그의 최근의

     어려웠던 고통기간을 감안하면 오히려 다행하다 할것

     이오.

       병문안을 거절하는 그의 부인(윤순자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많은 관심 있는 동기생들도 문병을 못갔었으니

     우리들 모두의 심정도 크게 다를게 없었다 하겠소.



***   오늘(1월 22일) 아침에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낭독된 "해부학 교실

     을 대표한 조사선 교수"의 [조사]를 입수하였기에

     <고 장가용 교수를 추억하는 차원>에서 우리 홈에

     띄우면 어떨가 싶어 첨부로 보내오.



               2008.  1.  22.    동기회 총무    심   영   보.


삼가 장가용 교수님 영전에 올립니다.

근자에 선생님께서 많이 편찮으신 것을 알았지만 다시는 선생님을 못 뵐 영별의 자리에 이렇게 빨리 서게 되다니 참으로 슬프고 허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돌아 보건데 선생님께서는 해방과 전쟁의 혼란을 겪으시며 남들이 잘 가려고 하지 않은 기초학자로의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하시어 정년을 맞을 때까지 초지일관 학문연구와 교육에 진력하시어 후속세대로의 해부학 전수에 가교 역할을 다 하셨습니다. 제가 교실에 처음 입문 했을 때 선생님은 조교수의 신분이셨지만 마치 조교와 같은 역할을 다 하셨지요. 위로는 층층시하와 같은 여섯 분의 선배 교수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조교 한 사람도 없이 보건기사인 유필선, 황인화씨를 거느리시고는 그 많은 해부학 실습과 조직학 실습을 도맡아 하시며 밤늦게 귀가하시든 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처음엔 이런 일을 내가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섰지만 천성이 자상하고 다정다감하신 선생님께서 하나하나 일깨워 주시고 가르쳐 주셨지요. 특히 저녁에 진아춘 자장면을 시켜 함께 하시며 교실의 대대로 내려 온 묵은 일과 새로운 일들을 정리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막차 시간에 쫓기던 저를 차에 태워 역까지 데려다 주셨든 기억이 새롭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시며 교실 발전에 헌신하셨을 뿐만 아니라 해부학회의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학회 총무를 맡아 어려운 학회 살림을 도맡아하셨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시며 학회조직을 혁신하여 학회를 활성화하고 효율을 높이는데 기여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이처럼 학회의 중심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신 것은 학회에 대한 애착과 봉사 정신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실은 많은 회원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공사를 구분하는데 있어 냉정 할 만큼 공인 정신이 투철하셨지만 또한 인간적인 풍모를 많이 지니셨습니다. 선생님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하셨는데 학연이나 지연을 가라지 않고 연령까지도 초월하여 누구와도 대화 하시는 친화력을 갖고 계셨기에 선생님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술을 매우 좋아 하셨고 특히 술좌석의 분위기와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담소를 좋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셨는데 실제로 가수 못지않은 발군을 시력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셨지요. 특히 회무와 학술토론으로 격론을 하다가 감정이 남기라도 하면 서둘러 행사를 마치고 뒷자리로 옮겨 서로 담소하고 애창곡을 합창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켜 서로의 오해와 감정을 말끔히 풀어 버릴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항상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2000년 봄 정년 송별연에서 많은 이들의 축사에 대한 답으로 선생님은 “나는 재주가 없어 그 동안 하고자 하는 일들을 다 하지 못하고 떠나지만 후학들이 잘 해 주리라 믿는다“ 는 말씀을 하셨지요,
학자의 꿈과 이상을 품고 해부학을 천직으로 여겨 평생을 강의실과 연구실을 지켜 모범을 보여주신 선생님의 모습은 우리 후학들의 가슴속에 귀감이 되어 길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실원 모두는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교실과 해부학 발전을 위하여 온힘을 기우릴 것을 다짐하오니 속세의 못 다하신 일들을 저희들에게 미루시고 가시는 길 평온 하옵 기를 빕니다. 슬픔을 참고 우리 모두 이렇게 서서 선생님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고이 잠드소서.

2008년 1월 22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원 일동
멀리 떠나가신 장가용선생을 기리며:

아직도 쨍쨍한 약간 high pitch 음성이 귀에 들리듯하건만 이미 저 세상에 가신 장교수를 생각해봅니다.

예과에 다니던 아느날 내가 애를 써서 피하려던 둔탁한 평북사투리를 하나도 주저없이 누가 큰소리로 말해서 돌아다 보니 자그마한 귀여운 소년 얼굴의 장가용씨 였습니다.  남들이 놀릴가봐 힘들게 서울말을 써가면서 내고향 평안도 사투리를 피하던 저에게 그의 당당한 평북말씨는 참 인상적이었지요.  그가 바로 그 유명하고 존경을 받아오시던 장기려교수님의 아들이며 두분만이 이북에서 남하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안것은 훨씬 후였지요.

그러한 괴로운 환경임에도 불고하고 장가용씨는 늘 명랑하고 친절하고 따뜻하셨지요.  수년전 미국에서 열린 남북합동 학술회의를 미시간 대학에서 열었을 때 한국에서 참석하셔서 학회를 하는 동안 자리를 같이 할수 있어서 더욱 동기로서의 우의를 키울수 있었지요.

우리 동기35주년기념 문집에는1995년 새로 태어난 증손자를 오래 즐기지 못하시고 타계하신 아버님 장기려교수님을 애도하는 그의 글이 눈물겨웠읍니다. 
그후 졸업40주년기념문집에는2001년 헤어진지 50년만에 어머니를 이북에서 만나셨던 가슴 아픈 글이 있었지요.  50년간 부인과의 재봉을 기다리시던 남편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이북에 계시던 어머니를 껴안고 찍으신 모자상봉의 사진은 참으로 눈시울을 뜨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커다란 슬픔을 안고도 늘 밝게 보이시던 덕성을 더 이해하고 존경하게 해 주었지요.

이제 타계하여 저 세상으로 가신 장가용교수님 아마도 먼저 가 계신 아버님과 재 회의 기쁨을 나누고 계심을 믿고 저희동기들 위로 받으렵니다.

동기생 이혜원


지금 서울에서 전화가 왓는데  밀알모임에서 부조금 100만원을가지고 서울의대 빈소에 차저 갔더니  딸이 친절이 상주역활을 잘하드라구.

내가 다시 밀알모임을 소개하면  서울고등학교졸업하면서 새문안교회에서 12명의
회원이 모여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일으노니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맷고 죽지않으면 한알그대로잇나니라. 따라서 시작 하였네.

그당시 장기려교수가 자기아들도 참가해서 신앙교육을 같이 받고 봉사하는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같이 한강 철교 밑에  약 4000세대의 난민이 살앗는데 돌보는
정부기관이 전혀없고  하여 우리모임에서 매주토요일과 주일오후에  그곳에가서
무료 진료를 열심히 햇지 . 그때 장가용도 매주나와 불상한동포들을 진료하는데
열심히 봉사햇다구. 58년에 수재가나서  이주민들을 응암동 산기슬게  천막을 치고
그쪽으로  옴겨놓았는데  그곳에도 주말에는 열심히 의료 봉사를 같이 햇다구.
경복 출신이지만  평안도 출시이 대부분이여서  같이 어울려  방학때면  강화도
충북 모산면 무의촌 진료로 . 효성물산회장이 담낭염으로 백병원에서 수술을
장기려교수가하시고 민병철조교수가 제일조수로 수술이 잘되엿고 수술비를
안받으시니까 대학병원 건너편에 집을 한채 거져 그분이 들여서 조카가 수발을
들엇는데  점심시간에는  차철준 이대일 최지원이 같이가서  우리 변도를  펴고
장기려 교수에 말씀을 듣고  많은 신앙의 도움이되엿지. 그래 내가 김일성 맹장을
수술하셧는가를  물엇더니 당신이 진찰만 하엿는데  김주석 앞에서  기도하지않으면
진찰및 수술도 안하신다고 김주석 말씀을 햇더니 기도하고 진찰하라고 하여  한참기도 하신후 진찰 해보니  정말 급성 충수염이라고 햇더랍니다.  그런데 수술은 자기가
안하시고 쏘련군의관한테 받앗다고 하시드군.
그러나 의대 졸업후  오랫만에 귀국해서 동기들이 모이는장소  명륜동 어느 한식점에
가보면 그렇게 소주를 마시며  인생은 짧고 굴게 사는것이 좋다며 박태규와 둘이서
주거니받고니 하길래 나도 당뇨병으로 고생하는데 술마시지말라고  당부를 해도 들을 생각도 안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드군 태규가 많이 섭섭 할거야.
가용이 애인이 이대 약대생이 있엇는데  사랑안해준다고  미스안이 병이나서
서울 대학병원에 전종휘 교수병실 전염병동 장기려교수 와 의형제인 전교수가
진료를 하게 되엿고  그당시  하도 유명한 사건임으로  이대 김옥길 총장이 문병오고 온통 날리를 첫지  그러나 종래 결혼못하고 발앗지.
가용이와 그후에도 밀알 모임 친구들과 게속 교분이 두터워 내가 서울가 면 자주 만나지.  그러나 말년에 병이 심해저서 투석도 일주일 3 번식 하게 되여 내가전화 하여
신장이식을 권햇는데  하지않고  그대로 살다가 가겟다고 하여 차철준이보고
한번가보라고 햇더니 그때는 앞도 못보고  모든상태가 나빠젓다고  그러드군.
내가 원햇던것은 사실 내가 더 당뇨가 심해저서 합병증 막으려고 온같 노력을 기울이는것 같이 가용이도 내말을 들엇더러면 더살수있엇지않았을가  안타가운 마음으로
그가 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였으니 이다음 천국에서나 맞나보기로하고
이만줄입니다
최지원드림.



작년 봄엔가

다른 볼 일로 대학병원에 갔었는데



복도에서 우연히 장가용교수 부인을

만났지요



아프고 나서 한 번도 못 가본 터라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부인은 나를 이끌고

입원실로 데리고 가더이다



그 때가 아마 상태가 입원할 만한 상태였던가 본데

가용은 반듯이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마치 기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소



누구누구가 왔다고 해도

그러냐는 듯 미동도 않고 계속 눈을 못 뜨기에

몇마디 우물쭈물 건네고 나올 수 밖에 없었지요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순간이었고

그날 하루종일 허공을 걷는 기분이었다오



"가용,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잘 사시게!

내 가거든 그땐 눈을 뜨고 만납시다."





님의 품으로 가버린 형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님의 품이 그리워서
폭신하고 따뜻한
엄마 품을 그렇게도
아쉬워 하드니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잊지 말고
내 자리 잡아두시오
님이
그리 하신다고 하시었소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형의 정답고 따뜻한
피양 사투리
그 미소는 언제 나를 반겨줄지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님의 품이 그리도 그립소
우리자리 잡아두시오
언제 또 모닥불 피울 수 있을지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내 소주잔은
그냥 두고 가시요
그래야, 그리움과
내가 대작을 하지 않겠소

형, 곁에
내 자리 잡아두시오



장가용형의 영전에 이 시를 드리오.

강창욱
멜리렌드 에서 2008.1.24





A Giant of a Man

What told the time to take you along?
Does it not know in you
So much left for this world?

This world
Where you ran, stomped, jostled,
Talked, laughed, cackled,
Sang songs, emceed unruly throng,
Loved, worshiped,
And suffered.

The world where you raised family,
Spread the knowledge, planted the faith,
Gave yourself for the good of others.

Then in a flash.

Are you not with us
In this world of mirth and pain?
In this unfathomable world of
Promises and illusions?

Life lived with passion leaves no tears.
Life lived by undying love cannot be undone.
Yours thus remains a glorious monument.

With you gone,
The world feels barren
Like a naked beach.
We cry out for you,
Our calls return without an echo.

Rest in peace
In that favorable place
With everlasting love
And with sweetest music.

Forever a friend,
Giant of man, Ka-yong.


Seung-Kyoon Park



장가용 학형을 떠나 보내며 (1)

                                                                                                                    김용일   

  지난 1월 18일 그렇게 정답게 40년을 함께 지났던 가용군이 그의 가족과 우리 동기들을 남겨놓고 먼저 훌쩍 이 세상을 떠났다. 학문 앞에서는 그렇게 냉철하면서도 막걸리집이나 점심 장소에서 그처럼 다정할 수 없었던 친구를 잃는 마음을 너는 아는가. 서울대학교병원 2층 6호실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影幀)을 물거름이 쳐다보다가 울컥하는 비애와 생의 서글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 던 것이 나도 모르게 그가 정년퇴임할 때가지 지켰던 연구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30여년을 지켰던 그의 방을 물거름이 쳐다보다가 그만 우리 손으로 세웠던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 곁에 주저앉아 한참 옛날 생각을 하면서 그의 넋을 달랜다. ‘잘 가라, 이놈아’ 하고 야속해하면서 말이다.
 
  1957년 11월 초겨울 본과 1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들 15회 동기 132명은 일인당 1만환씩 거두어 우리의 해부실습을 위하여 시체를 내어준 영령들의 넋을 달랜다는 이유로 비석을 세우기로 용단(?)을 내렸다. 해부실습을 하면서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의견에 모두들 동의하고 전원이 이 결정에 동참하였다. 200 여 만환의 거금(당시는 그랬다)은 모아졌으나 비석에 무엇이라고 새겨야 할지를 놓고 싱갱이 끝에 비석 걸립에 앞장섰던 6명이 장가용군을 앞세워 (고) 나세진 교수실을 찾았다. 장가용군은 그의 아버지(장기려 교수) 덕에 나세진 교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드리자 나 교수는 역정을 내시면서,
이놈들아. 요컨대 ‘우리는 감사한다’ 그런 뜻을 담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우리의 옹졸함을 야단치셨다(그래서 비석명이 ‘우리는 감사한다’가 된 것을 가용이 너는 기억할 것이다). 마침 김동석군이 서대문에 위치한 비석 집을 알아 와서 드디어 1957년 1월 겨울방학 중에 비석 제막식을 갖게 되었지. 몰론 나세진 교수를 모시고 오는 일에 나는 장가용군과 함께 가서 독일인 교수(나세진 교수를 방문 중이었던 해부학 교수) 손님을 모시고 와서 제막식을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교수는 독일말로 더듬더듬 격려사를 하셨으나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는 친구도 그 독일인 교수도 없었다(엉망진창인 발음 때문이었다고 킥킥대었지). 그 이후 5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의과대학 의학과 1학년 학생들은 해부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비석과 해부학실습실 사이 마당에서 막걸리와 떡을 사다놓고 제사를 지내곤 하였던 자네가 아닌가. 때로는 가용군이 사체 해부의 소중함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정신으로 실습에 임할 것을 당부하던 자네를 보던 생각이 불현듯 되살아나는구나. 그리고는 식이 끝난 후 나는 늘 가용군과 함께 제사상에 차려진 막걸리를 마시면서 그 옛날 비석을 만들던 생각을 더듬었지. 그러던 녀석이 이처럼 멀리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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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4월 장가용군과 이대일군 그리고 나 도합 세 사람은 많은 동기생들이 자신의 인생행로로 정하기 꺼리던 기초의학의 길에 무급조교 겸 대학원생으로 들어갔다. 장가용군은 키가 작았지만 매우 다부졌고, 교실의 많은 교수들(나세진, 이명복, 장신요, 김재남, 성기준, 이광호 등 이상 전임강사-교수급)과 조교(백상호, 나봉진, 장가용)들이 기라성처럼 버티고 있어서 학생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으나 장가용군만은 정이 많아 학생들이 따르던 친구였다. 그래도 우리가 학생 때 알던 가용이와는 달리 성격이 매우 치밀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서 교실 살림을 도맡아 하곤 하였다. 

<에피소드 1> 장가용 ‘조교수’ 수상
  가용군이 해부학교실 조교 때의 일이다. 당시 의협신보(현 의협신문)에서는 서울의대 생리학교실의 이상돈 전임강사가 제1저자가 되고 장가용 조교와 장신요 교수가 공동저자가 되어 동위원소를 이용한 조직발생에 대한 실험연구가 수상을 하게 되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그 정도의 수준이면 장가용군은 조교가 아니라 조교수일 것이라고 생각한 신문기자는 (그래서인지) 그를 장가용 조교수라고 기사를 썼던 것 같았다. 내가 전화로 수상을 축하하자, 무급조교가 조교수보고 존댓말을 쓰지 않고 축하한다고 일갈(一喝)성 농담을 하던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친구이기도 하였다.   

<에피소드 2> 제7후송병원에 둥지를 튼 장가용 대위
  1964년 우리는 3년의 조교생활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로 가서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많은 기초의학 입대자들은 되도록이면 연구분위기가 되어 있는 부대이면서 서울 근교에 있는 의정부 창동 소재 제7후송병원 부설 유행성 출혈열 연구반(EH Fever Research Center)에 배치되기를 소망하였다. 제일군(第一軍)에 속하면서 서울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출근할 수 있고 모교 방문이 간응 위치여서 누구나 소망하던 곳이었다. 나 역시 그곳에서 공부하기를 원했으나 나 나세진 당시 의과대학 학장님은 나의 추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이미 장가용군을 추천해두었으니 해줄 수 없다는 야속한 거절이었다. 마침 교무과장이던 이찬범 교수(흉부외과학)가 현장에 계셔서 학장님의 단호히 거절하시는 것을 보고는 자진해서 도움을 주셔서 이대일군과 내가 함께 원주에 있는 야전의무시험소로 가게 되었다. 언제나 장가용군에게 판정패 당했던 때여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에피소드 3> 장가용 소령과 김용일 대위
  군 근무시 그는 일주일이면 한 번씩 보건사회부 산하 국립보건원(불광동 소재)에 들러 유행성 출혈열 환자 혈청을 전해주고 내가 있던 수도육군병원에 들리곤 하였다. 참 부럽기도 했던 장대위였으나 결국 나는 수도육군병원 병리시험과로 불려오고 이대일군은 원남 비둘기부대를 지망하여 3명의 동기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또 장가용군에게 판정패를 당한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있었다. 군 근무 임기 말이 되면서 중견 군의관 부족으로 우리 모두가 근무기간의 연장설이 돌았고, 모두 소령 진급 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마침 ECGFMG 합격증을 가진 친구는 제대를 할 수 있다는 명분이 발표되어 나는 병리학교실 이성수 교수의 병리학교실 입국 요구조건이었던 ECFMG 없이는 입국을 불가능한다는 협박통에 졸업 시에 이 시험을 치렀고 덕택에 3년 만에 제대하였지만, 장가용군은 해부학 전공이라 ECFMG가 필요가 없어서 응시하지 않아, 결국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제대하는 7월 4일 군 제대를 앞두고 장가용군을 만나 「어이 가용아. 나먼저 간다.」하고 부르니 이미 소령 뱃지를 달았던 장가용군이 “상급자에 가용이라고 부르다니...」하지 않는가. 그런 여유를 가지며 불평하나 하지 않고 군생활을 즐겼던 사나이였다.
 
  덕택에 나는 장가용군보다 1년 반이나 앞서 대학 전임강사 발령이 났으니 나는 드디어 장가용군보다 앞설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1068년 그가 대학에 들어올 때 ‘너의 형님이 자네의 전임강사 발령을 축하하노라.」 하고 전화를 하면서 새옹지마 같은 삶을 함께 살았다. 군 근무 시 장소령이 나에게 「야 용일아. 강사 발령을 축하한다.」고 전화를 걸어왔으나 나는「이제는 네가 나한테 형님이라고 할 차례다」라고 대응하였던 생각이 난다.
 
  그는 대학이 중심이 되어 통합교육이다 선택과목제 등 교육계획을 질색하였고 각 교실이 하는 학문적 자율성에 대하여 대학이 ’콘놓아라 팥놓아라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교수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짜면서 명강의(혈액, 림프계 해부/조직학 강의를 즐겼다. 좀 자유주의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입방아를 찌으면서도 37 여년을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정말 그는 멋진 삶을 여유롭게 살았고 많은 대학에 불려 다녔다. 특히 이대일군과는 매우 가까이 지내어 자주 대학로(문리과 앞 대학천이 흐르던 길)의 여러 음식점에서 자주 취중 농담을 즐겼으나, 수업 전날은 절대로 시간을 내지 않고 착실히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고 해서 술잔을 기울일 수 없었다. <제2부는 다음에 다시 보내기로 약속한다.) 더기회 총무를 맡아서 일을 하다가 회장을 한 후 다시 총무를 맡아서 우리 동기 일을 심영보군과 일을 했던 친구였다. 가족을 남겨놓고 먼저 가버린 가용 이 녀석아. 잘 가라,  아버지 장기려 교수님을 먼저 만나 뵙고 북한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드려라.
  (다음 제2부에서는 제주의대 학장, 한동의대(?) 학장 시절의 장가용 교수의 개인생활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가용의 추억

평창에서 2001년 졸업 40 주년 잔치 때 우리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상완이 너 하태(河泰)씨 알지?”
“네가 어찌 그 어른을 아느냐?”
“그분의 큰손자가 나의 수양아들이거든”
“그게 정말이냐?”
“응, 사실이야”
그 후 가용이를 만날 때마다 河 회장님 내외분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분 가족들의 안부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독특한 카랑카랑 목소리로.

가용이! 불과 한 달 전에 이재흥을 만나 자네 병세를 물어보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갈 줄은 정말 몰랐어. 오늘 빈집을 지키고 있는 자네 딸과 전화하여 자네가 심장마비로 급히 떠난 사실을 알게 되었네. 부디 질병과 고통 없는 저세상에서 편히 쉬게나.

2008. 1. 23.

이상완      



河泰씨; 나의 고향 이웃마을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동문인 조홍제 씨와 함께 이병철 씨를 도와 “삼성” 창업 멤버로 활약, 그 후 기업인으로 성공했으며, 일처리가 원만하고 성품이 온화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임.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외사촌 매부가 되고. 서울에서의 학창시절과 수련의 기간동안 자주 그분 댁에 들렀지만, 내가 서울을 떠난 후 방문할 기회가 아주 드물게 되었음.    

장가용을 보내면서


주여
받아 주소서

당신의 아들
여기 눈감고 누워 있습니다

티끌 하나 없이 왔다가가
티끌 하나도 없이 살다가
티끌 하나 없이 떠나는
삶이
눈감고 누워 있습니다

주여
받아 주소서
당신의 아들

내 마음 속에
작은 제단을 허락 하소서

나만의 작은 제단을 쌓아
당신의 아들이 그리울 때면
그 문을 조금 열어
그가 걸어간 티끌 없는 길을
더듬어 보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티끌 하나 없이
긴긴 세월을 걸어 갈수 있었을까
곰곰히 생각 하게 합니다

주여
그래서 나는 당신의 아들이
이처럼 자랑 스럽습니다

내맘속 제단 작은 문에
정다운 이름 '장가용'이라 새겨
들어가는 길 깨끗이 쓸어 놓고
온 세상에 그의 걸어간길
보일려고 합니다

주여
받아 주소서
눈감은 평온한 당신의 아들
허락 하소서


      장가용의 함진애비 정두현

가용아 잘 가라 (2)
그의 졸업후 활동을 뒤돌아보며
김용일

  지난번에는 강창욱 동문이 편집하는 Yesterday에서는 장가용군의 대학 및 군 근무 시절에 대해 잠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그의 퇴직 후 생활을 간략히 소개하며 그를 떠나보낸 동기 한 사람의 아쉬움을 달랠까 한다.

1. 해결사 장가용 교수의 제주의대 학장 시절
  장가용군은 1996년 9월부터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설립을 위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파견근무를 시작하였고, 뒤이어 초대 학장(1998. 3 - 1999. 8)으로 대학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이 대학은 제주 시내에 있는 신설의대이고 한 학년 당 40명을 선발하는 소규모의 대학이기는 하였으나 꽤 알찬 대학이었다, 그러나 장 학장은 입학생의 90%가 육지 출신이라는 데에 자주 불만을 토로하였다. 사실 제주도에는 그 정도의 졸업생을 수용할 지역사회의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심기는 날이 갈수록 불편해 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부속병원이 없는 상태에서 설립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초기 졸업생들의 임상실습을 담당할 대학부속병원이 없어서 제주의료원(구 제주도립병원)을 대학병원으로 인수하는데 정성을 다 쏟았다. (나중에 그는 제주대학교 총장, 도지사, 제주의료원장 등을 설득하여 이 난제를 원만히 해결한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임상계 전임교수를 확보하려는 집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일차적으로는 서울의대 교수를 시간강사로 초청하여 강의를 부탁하는 전략을 펴는 한 편, 교수 정원을 얻기 위하여 총장과 정부를 설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정부는 의사의 과잉배출을 우려하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정규 교수를 초빙하되, 교수로서의 기초적인 자질을 가진 교수를 전국에서 찾고자 하였던 바, 이 정경은 마치 희랍시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인재를 찾고자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데네 뒷골목을 헤맸다는 에피소드를 연상케 하였다. 그는 워낙 고지식하고 수준이 높은 학자인지라 자질이 검정되지 않은 교수를 전임교수로 초빙하려 하지 않았고, 여의치 않자 결국 모교인 서울의대 각 주임교수를 설득하여 졸업생 중 출중한 후배를 선발하여 충원하였고, 그 배경에는 모교 출신들이 지닌 책임감과 학문적 의지를 제주의대에 심고자 하였던 장 교수의 뜻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부족한 전임교수를 아무나 모시기보다는 정성을 들여 모교 교수들을 시간강사로 모시려 하였고, 이들의 수업이 끝나는 날 저녁이면 으레 제주 시내 일식집에 데리고 가서 저녁 대접을 하고 정종으로 피로를 풀게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 주마다 이런 행사를 치러야 하였음을 생각할 때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무리하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세운 이 대학은 이제 어엿한 마지막 국립의대로 탈바꿈 하였고, 그 뒤에는 언제나 지친 몸을 이끌고 대학을 세웠던 장가용 학장이 있었던 것이다.
  2년간의 파견 임기를 마치고 쉬지도 못한 그는 퇴임 후 모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한동대학교(漢東大學校, 포항 소재) 의과대학장으로 초빙되어 갔으나,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하고 (졸업생을 미국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의사가 되도록 한다는 무리한 재단 측의 계획)에 맞서 끝까지 정규화하려다가 사의를 표하였으며, 결국 부임 초기의 의지를 펴지 못하고 도중에 퇴임하였다.

2. 지병(持病)과의 싸움
  더욱이 그는 오래 전부터 당뇨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병 치료를 등한히 하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는 것이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이나 제주의대에 근무하던 후학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이었다. 기초의학자이면서 제주도민이 아니라는 지리학적/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디디고 전임교수를 초빙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음은 알 사람은 알리라.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그가 결국 당뇨병으로 인한 신병증(diabetic nephropathy) 때문에 사망 전까지 매주 신투석(hemodialysis)을 받아야 했고, 그리고 이에 더하여 동맥경화증의 합병증 치료를 뒤로 하였으며, 오직 대학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결국 하지 절단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일은 제도의대 학장 시절에는 극히 가까운 제주의대 교수나 출신 교실의 고수들만 알고 있었을 뿐, 동기들까지도 이를 눈치체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국내의 많은 동기들은 그저 소문으로만 그의 질병과의 투쟁 이야기를 듣고 전화로 방문의사를 밝혔으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로 끝까지 친구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3. 장 교수의 연구분야
  그의 연구는 해부학 중에서도 림프계의 면약반응에 대한 조직학적 연구이며 대한해부학회 회장의 격무와 해부학교실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일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테니스로 자신의 몸 관리를 할 수 있다고 한 것 같았다. 정말 자기 분야의 학문 이외에는 무식하리만치 자신의 병 치료에 게을렀다. 특히 그의 관심은 학생들에게 대한 애착과 해박한 면역학적 반응 연구이었고, 특히 비장이나 림프계의 근원적인 조직발생이나 조형기능 연구는 익히 그의 논문으로 일찍부터 증명한 바 있다.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에서는 우리보다 3년 선배인 김윤범 교수(시카고 대학)와 함께 germ-free animal에서의 면역 반응 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를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연구여건이 열악하여 그의 뜻을 지속적으로 충분히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cadever 실습에는 그렇게 정성을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4. ‘서서 이야기해라’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아버지인 장기려 교수 (전 서울의대 외과교수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 절제수술을 시행한 분) 슬하의 6남 중 제일 아래  아들로서, 아버지인 장기려 교수는 잘 알려진 성인군자로서 부산 인제의대 교수, 보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근무하였으며,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막사이사이 평화상)을 수상하신 분이였으며 이광수 선생이 쓴 소설(사랑)의 모델이라고 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장가용군을 데리고 단 둘이서 6.25 시에 월남하였으나, 이직도 어머니가 이북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의 이북 방문으로 확인되었으며,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이야기는 세상이 다 아는 정도의 효자였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유난히 키가 작았던지라 멀리서 보면 앉아 있는지 아니면 서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들어 때로 친구들은 서서 이야기하는 그를 향하여 ‘서서 이야기하라’고 농을 걸며 좌중을 웃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 중에는 미국에 있는 차철준 군, 학내에서는 이대일 군이 있다. 차군과 장군은 둘 다 경복고 출신이고 키도 작아서 그런지 오랫동안 왕래가 있었고 재학시절부터 매우 가깝게 지났다고 한다.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가 매겨져 있던 때라 같은 실습 팀으로 편성되어서 그런지 이들 두 사람은 늘 함께 다니곤 하였고, 그 의 친구 사귐도 따져보면 매우 선별적이었으나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5. 매듭을 지으며
  그에게는 안과 전문의인 윤 선생이 종로구 명륜동에 개원하고 계시고, 장남은 의사가 되어 현제 인제의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장기려 교수 이하 가족 대부분이 의사이니 의사집안이라고 해도 괜찮을 성 싶다. 이제 가용군은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 처럼 효자이고 애처가이며, 직분에 충실한 친구도 흔치 않은 기초의학자를 우리는 잃은 셈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책 펴고 공부하려 하는 그를 이제 놓아주련다. 편히 천당으로 가서 쉬어라. 
장 가 용  


주여, 받아주옵소서  
당신의 아들  
티끌 하나 없이 왔다가    
티끌 하나 없이 살다가    
그는 떠났습니다     


장가용,       
성스러운 친구를 잃어버린 서러움,  
우리들의 슬픔을 아시나이까    
향을 피우고  통곡해도 슬픔이 가시지 않습니다


다정한 친구를 잃은 동기생의 슬픔이 여기
몇마디로 남겨저 있습니

 
          With  you  gone,
          The  world  feels  barren  
          Llike  a  naked  beach.
          We cry out  for  you,  
          Our calls  return  without  echo.    *1


그의 독특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 - - -   *2   


부디 하늘 나라에서는
아픔과 괴로움이 없는
영원한 삶을 바랍니다          *3     


미국에 있는 친구들 멀리서 나마 
고인의 명복을 빌기 바라네               *4   


May  the  sunshine warm  upon  your  face
And  until  we  meet  again.                             *5 


장가용 동기 생이 오랜 투병 생활을 청산하고 
평화와 안녕 만이 깃든 하늘 나라로 먼저 간것은
고통 기간을 감안하면 오히려 다행 - - - - -     *6    


둔탁한 평북 사투리를 하나도 주저 없이 - - - - -
2001년 혜어진 어머니를  50년 만에 이북에서 맞났던
가슴 아픈 글 - - - - - -             *7                                                                                                                           

형 꼭 먼저 가야 하나요 
엄마 품을 그렇게 아쉬어 하더니 - - - - -
정다운 피양 사투리 - - - - - -                    *8    


해방과 전쟁의 혼란을 격으시며 남들 가려고 하지 않는
해부학 기초 학자로 정년 까지 연구와 교육에 전력 - - - -
학자의 꿈과 이상을 품고 해부학을 천직으로 - - - -      *9  


장기려 교수[장가용의 아버님]께서 가용이도 참가해서
신앙교육을 같이 받고 봉사하는것이 타당하다 하여
4000 세대의 난민이 사는 한강 철교 밑에가 진료를 했지 - - -  *10   


학문 앞에서 그렇게 냉철하면서도 막걸리 집이나
점심 장소에서 그처럼 다정할수 없었던  - - - - - -
친구를 잃은 마음을 너는 아는가.
우리 손으로 세웠던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곁에
주저 앉아 옛날 생각을하면서 그넋을 달랜다
‘ 잘 가라, 이놈아’                                                              *11 


인생에 세 친구  윤범수 교수, 차철준 교수,이완제 교수
있다고 했지, 세친구 다 두고 가는 아픈 마음 못지 않게
내 마음도 아프다. 2000년 8월 이북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보았지만 그리움을 다 풀지 못한 아쉬움 견디기
힘들어 칼리포니아 까지 왔었지 그러나 나의 위로도
충분치 못해 하나님께로 가는것이냐. 위로를 받고
편한 쉼을 얻어라.     가용아, 잘가거라.               * 12                                      



누구나 긴 삶의 여정에서 가슴 속에                                                                            몇개의 무덤을 깊이 간직하고 있지요
많은 추억들이                                                                                                                사랑이                                                                                                                              함께                                                                                                                                함춘원 에 뭍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받아주시옵서소  
당신의 성스러운 아들이 당신 곁으로 갔습니다        


장가용의 결혼전야 함진 애비 정두현이   
삼가 두 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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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승균,  
         Professor, department of Pschiatry
         University  at  Buffalo   Medical  School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조시   A  Giant  of  a  Man  에서 인용함  

*2.     이상완,  
         정형 외과  전문의.
         조사 -  ‘가용의 추억’에서 인용함  

*3.      김진호 
         정형외과학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조사중에서 인용 함       

*4.      이재흥     
         안과학 교수
         서울 대학교 의과대학  
         조사중에서 인용 함     

*5.      조은순
          Diplomat, American Board of Surgery  
          게일의 기도에서 인용 함 

*6.       심영보 
           외과 전문의
           조사 중에서 인용 함  

*7        이혜원
           Professor, Hepatology
          Jefferson Medical School, Philadelphia,PA.     
          조사중에서 인용 함     

*8.      강창욱
          Diplomat, American Board of Pschiatry
          Baltimor, MD.
         조사 중에서 인용 함      

*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 직원 일동
         조사 중에서 인용 함 


*10.    최지원
         내과 전문의
         조사 중에서 인용


*11.    김용일    
         병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조사 중에서 인용 함    

*12.    차철준
          Professor, Department of pediatric[Neonatology]
          Loma Linda Medical School , Califo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