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주류, 이회창 씨 에게


안녕하신지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께 보내는 편지글을 청탁받았을 때 저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 후보께  편지 형태의 글을 쓴다는 일은 저의 부족한 상상력 범위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제 상상력안에 끌어들인  뒤에도  이 후보께서 읽지 않을 가능성이 큰 글을 쓴다는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설혹 이후보께서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 후보의 마음에 들만한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없으리란 점도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렇치만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탐탁치 않은 글이란점보다 내 앞을 가로 막은 것은 무의미한 글이 되리라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든 편지글을 쓰는 것은 그 안에 진솔한 마음을 담아 받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래서입니다. 저는 이후보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난 글을 다 청탁하네’라고 혼자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불현듯 ‘화동1본지’와 그 학교 교실마다 붙어 있던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생각나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오늘의 이회창’께는 할말이 전혀 없지만 ‘화동1번지의 이회창’께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듯싶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이재오, 김문수’에겐 할말이 없지만, ‘어제의 이재오, 김문수’에겐 할말이 남아 있는 것과 흡사합니다. 오늘엔 꿈에서도 맞나지 않을 남의 나랏말이 되었을 ‘민중’이 ‘어제의 이재오, 김문수’에게는 현실 속의 우리말로 남아 있듯이, 오늘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 ‘어제의 이회창’께는 현실속 우리말로 남아 있을 듯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후보님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한 바와 같이 이 후보님은 한국사회의 대표적 ‘주류(메인스트림)’입니다. 나라의 최고권력인 대통령 자리에 이미 도전했고 또 도전할 만큼 주류 중에서도 주류이고 정치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주류는커녕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애당초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될 능력도 없지만 그럴 의사도 없습니다. 이후보와 저는 한국사회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 사회의 주류에 속한다는 것이 이후보께는 ‘자랑’일 수 있지만 저에겐 ‘부꾸러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일제가 망한 뒤, 아니 망하기 전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주류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이 후보와 저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서로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다른 삶을 살아온 이 후보와 저 사이엔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동1번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이후보가 저의 대선배가 되시지요. 이 글을 읽는 분들중에 제가 경기중고교를 끄집어낸 것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실 분이 있을것입니다. 그렇치만 저로서는 어쩔수가 없는 일이니 양해를 바랍니다. 이 후보와 저를 연결해 주는 것이라곤 그것뿐이어서 그것에서 글의 실마리늘 찾을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앞에 말했듯이 ‘오늘의 이회창’과 달리 ‘화동1번지의 이회창’은 아직 마음의 귀가 열려 있다고 믿어져 펜을 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화동1번지의 이회창’에서 ‘오늘의 이회창’까지 반세기의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요즘 젋은이들은 ‘썰렁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렸돈 시절 책상 앞에 써 붙였던 ‘극기(克己)’가 그랬듯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도 당시 청소년에게 주어진 화두로서는  꽤 훌륭한 것 이었습니다. 그 교훈이 지금의 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이회창’에게도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꿈결에 지나 간듯한 길을 현실에서 다시 만난듯이 “아, 그랬지. 내가 청소년 시절에 다닌 학교의 교훈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었지”라고 회상하면서 반세기 전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을 견주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될수 있습니다. 반세기 동안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그것을 축약하여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을 꿈꾸었던 ‘어제의이회창씨”가 한국사회 주류임을 자랑하는 ‘오늘의 이회창 씨’가 되었다고 해도 큰 잘못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하여 ‘자유인’의 자유는 그것을 위해 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도 수호한다고 믿는 ‘자유민주주의’의 ‘자유’로만 남아있고, ‘문화인’의 문화는 한국 사회 주류의 ‘문화 부재’현상, 또는 ‘천민성’에 자리를 내주었고,’평화인’의 평화는 남북 갈등과 대결의식을 고취하는 <조선일보>와 벗하고 미국을 종주국처럼 보시는 것으로 남았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어린 시절 곳곳에서 ‘반공’이란 구호를 보았던 저는 프랑스 땅을 처음 밟았을 때 곳곳에 새겨진 ‘자유, 평등, 박애’를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워낙 부정적 구호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그 구호를 보면서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은 프랑스공화국의 상징인 ‘자유, 평등, 박애’를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화동1번지’ 출신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류는 그 대부분이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보다 ‘반공’이 더 잘 어울립니다.
       역사적으로 한국 사회의 주류는 일제 부역 세력에 그 뿌리를 두었고, 김구 선생보다 이승만을 모셨으며, 장준하 선생을 멀리하고 박정희를 가까히 모셨습니다. 일제시대의 순사가 한국 경찰의 요직을 차지했고 검사 서기가 검찰 요직에 발탁되었습니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일제 부역 세력은 분단의 좌우 구도를 이용, ‘반공’을 외치고 ‘종미’를 실천함으로써 다시금 한국사회의 지배계층이 될수 있었읍니다. 전두환의 폭압적 군사통치 시기에도 한국 사회의 ‘주류’에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마치 민족정기가 올바른 역사의식을 멀리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귀족이 되고 주류가 될수 있는 자격 요건인듯 했습니다. 이 점을 ‘화동1번지의 이회창’에서 ‘오늘의 이회창’이 있기까지 반세기 동안의 세월이 보여줍니다. 저에게 한국 사회 주류란 수구기득권 세력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은 박제된 화두, 무의미한 화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제시된 것은 기능주의적 시험 풀이 능력 ‘경쟁’과 ‘승리’뿐이었습니다. ‘3당4락’의 ‘서울대’ 입학이 일차적 목표였고 각종 고시 통과는 출세의 열쇠였으며 한극 사회 주류에 편입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올바른 정신은 요구되지 않았고 오히려 ‘불의에 눈감는’ 사람이 되기를 권유받았습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낸 오늘, 한국 사회 주류란 오직 문제풀이 시험 경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특권’을 누릴수 있는 자격을 딴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역사의식이 배제된 한국의 엘리트의식은 안에서 성찰하지  않고 밖으로부터 견제받지 않는 특권의식이었습니다. 취중이라할지언정 이후보의 ‘창자론’과 같은 조폭적 발언도 안에서 성찰하지 않고 밖으로부터 견재받지 않는 ‘일상’이 설명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일상은 박정희쿠데타 세력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법살하는 데 참여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만큼 인간적 양심을 엷게 합니다. ‘평화통일, 남북대화, 남북교류’을 주장한 민족주의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기억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만큼, 이후보의 ‘아름다운 원칙’에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택시운전을 했습니다. 이 후보처럼 이른바 ‘KS’ 마크인 제가 택시운전을 했다는 점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저 자신 택시운전을 쉽게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이른바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어줍잖게 ‘민중’을 말하기도 했지만, 제 머리에 스며들어 있는 엘리트의식과 먹물 근성을 오직 운전면허증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프랑스 땅에서 택시운전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인데, 저 자신이 이 점을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엘리트도 사회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없이는 주류도 없고 귀족도 없습니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것도 ‘귀족과 사회’의 관계에서 ‘사회 없이 귀족 없다’는 당연한 논리에서 ‘귀족이 되게끔 해준 사회에 대한 귀족의 책무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말하듯이, 한국사회의 엘리트와 주류에게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찾기 어렵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커녕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라는 개념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 물망에 올랐던 장상 씨와 총리서리 장대한 씨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한국 사회 주류의 일면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청문회는 장상 씨와 장대한 씨가 얼마나 ‘귀족답게’ 처신했는가의 긍정성을 물은 게 아니라, 부정성을 따진것으로 시작되고 끝이 났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으며 또 지금까지 올바르게 처신했느냐’를 따진게 아니라 ‘얼마나 잘못 처신했느냐’를 따진 자리였습니다.
       노불라수 오블리제가 갖는 구체적 의미는 무엇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때 가장 먼저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과 남보다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 사회 주류는 국가보안법을 강조하고 국방과 납세의 의무를 주장하지만, 일반국민의 수배 내지 열배에 이르는 병역미필율을 자랑하고 국민이 낸 세금을 사적 이익을 위해 유용하는 능력을 갖춘 특이한 존재들입니다. 일반국민보다 병역을 피할수 있는 사람, 성실하게 납세의무를 이행하기보다는 국민이 낸 세금을 유용할 수 있는 사람이 ‘주류’인 사회가 곧 한국 사회입니다. 그와 같은 한국 사회 주류의 유별난 특권의식은 ‘아들 둘이 병역을 필하도록 노력했으나 끝내 불가능했다는 점을 미안한 마음으로 설명하는’ 대신에 필하지 않은것에 당당한 태도를 갖게 합니다. 국민의 세금인 안기부 자금을 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용한다든지, 국세청을 동원하여 선거자금을 갹출한다든지 하는 행위도 견제되지 않는 특권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것입니다.
       이른바  ‘대쪽’은  ’성찰 없는 특권의식’의 당연한 귀결인 오만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 대쪽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은 자신에게 찬동하는 사람과 그렇치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칼날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칼날이 아니라, <조선일보>처럼 ‘오늘의 이회창  씨’를 적극 지지하는 세력과  ‘오늘의 이회창 씨’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구분하는 칼날입니다. 최근의(2002년 6월)서해 교전 사태와 관련하여 <조선일보>가 “’햇볕이 교전 불렀다”고 주장할때 ‘오늘의 이회창 씨’는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황국신민들만 ‘국민’이 될수 있다고 강제했던 일제시대의 ‘국민-비국민론’을 되돌아보지 않더라도, 국가보안법 개폐에 반대하는 정당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에서, 그 당의 대선 후보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비국민’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조선일보>와 같은 거대언론에 의해 부추겨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의 화두를 간직했던 ‘화동1번지의 이회창 씨’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견해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비국민’이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대권을 움켜쥐고 군대, 검.경찰, 정보 등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비국민을 사회에서 배제시키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것인지 말입니다. 아직 대권을 갖기 전임에도  ‘오늘의 이회창 씨’는 앵똘레랑스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겨레> 기고문을 문제삼아 정경희 씨에게 5억원 손배소를 청구했는가 하면, 아들들의 병역 문제를 다룬 오마이 뉴스, <신동아>, <일요시사> 등에 손배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회창 씨’는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견해를 발표할 자유만은 옹호한다”고 볼테르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언론 탄압이라고 비난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스의 무기를 드리대고 자기편에 대해서는 똘레랑스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회창식 이중성’은 법에도 적용됩니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 운동에는 ‘실정법 위반’이며 ‘악법도 법’이라고 하더니,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엔 ‘정의로운 법만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말바꾸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대쪽’을 자기 편인가 아닌가에 따라 구분하는 ‘칼날’인 것입니다.
       부디 특권의식과 오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공부를 하십시오. 시험문제 풀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 공부가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편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컬날’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대쪽’으로 거듭 나기 위해선 무엇보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특히 ‘공화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부는 지금이라도 게을리해선 안 됩니다. 헌법 제1조가 말하듯 대한민국은 이른바 민주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의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 공화국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컨데 지역 패권주의는 한국 사회 주류가 공화국 이념을 배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표입니다.
       2002년 봄에 실시된 프랑스 대선 1차투표에서 극우파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이 사회당의 조스팽을 누르고 2위에 올라 결선쿠표에서 자크 시라크와 맞붙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의 수치’라는 말이 <르 몽드> 사설에 등장하는 등 프랑스 사회가 온통 들끓었고, 투표권이 없는 고등학생들이 “공화국을 지키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 후보께선 프랑스 고등학생들이 외친 “공화국을 지키자!”에 담긴 공화국의 의미를 알고 계신지요? <조선일보>를 벗하고 정형근 씨를 오른팔로 두고 있는 이 후보님한테 공화국에 대해 묻자니 말이 막힙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정치학’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공화국(republic)이 되었습니다.  ‘republic’ 은 보시다시피 ‘re’와 ‘public’의 합성어입니다. ‘public’이 담겨 있는데서 알수 있듯이, 그리스시대로부터 공화국은 이미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법에 의한 권위가 행사되는 국가를 말합니다. 공화국에 반대되는 개념인 전제국은 노예화된 개인들에게 힘에 의한 권위가 행사되는 국가를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병역이 공화국 시민의 자격과 불가분이었던 것도 ‘공익’ 개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주류에게서 한국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찾기 어렵듯이 공익개념 또한 찾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를지배해온 수구기득권 세력, 즉 한국 사회의 주류는 노예화된 개인들에게 힘에 의한 권위를 행사하면서 사익을 추구하는 전제적 세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공익개념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습니다. 공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공화국 시민의 자격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이 공화국의 수장이 되겠다고 나선 모습을 ‘오늘의 이회창 씨’ 또한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정의가 질서(안보)에 우선한다’라는 화두가 공화국의 요체가 되는 까닭도 공익의 원칙에서 온 것입니다. ‘반듯한 나라’는 말뿐이 아니라 공익이 우선되고 강조될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회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은 질서나 안보를 성실하게 지킵니다. 반대로 안보와 질서가 사회정의에 우선된 사회에서는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듯이 사회정의의 요구가 안보와 질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압살됩니다. 안보와 질서 이데올로기가 사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을 위해 복무하는 안보와 질서가 되는 까닭입니다. 이 후보께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공화국 이념은 좌우가 함께 지키는 공통 분모로서, 공화국은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전제 위에서 ‘공익의 목표를 두고’ 토론과 설득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요구합니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쳐넣는 것은 이 후보께서 지킨다고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상반될 뿐만 아니라 공화국 이념에도 상반되는 것입니다.
       이 후보님이 내건 정강정책들은 거의 모두 제 견해와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름은 제가 좌파인 탓이 아니라 공화국 이념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에 따른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요컨데 이 후보께 ‘좌파적’ ‘사회주의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공익과 사회정의의 요구를 담은 공화국 이념이 반영된 것입니다. 실제로 사익을 추구하는 수구기득권 세력에게 공익과 사회정의의 요구를 ‘좌파적’ ‘사회주의적’으로 매도하는 일보다 쉽고 유효한 일은 없습니다. 분단 현실에서 진정한 보수는 찾기 어렵고 가짜 보수들이 판치게 된 내막입니다.
   가령 프랑스나 독일이 완벽한 무료 공교육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좌파 이념이나 사화주의적 요구가 반영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가 공화국이어서 공익과 사회정의에 의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화국은 스스로 싸워서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담겨 있다면 우리의 공화국은 껍대기뿐 내용이 비어 있읍니다. 이 점을 사회적 책임의식 없고 특권의식만 갖고 있는 한국 사회 주류가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비어있는 내용을 채워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인데 말입니다. 주5일 근무제를 비롯한 노동 정책, 경제 정책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적’ ‘좌파적’ 운운하기 전에 부디 그것이 공화국 이념에 따른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는 공화국 대통령 후보가 되십시오.
       이만 마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홍세화 라는 1947년생이 경기고등학교 후배로서 고등학교 선배인
이회창에게 한 편지 입니다. 제가 알기로 홍창기 형도 경기 출신이지요. 
이회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