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홍덕 글 모음 - 1

多病所須唯藥物


  “병이 많은 者, 모름지기 藥에 의존 할 수밖에….” 라는 뜻인가? 唐나라 詩人 杜甫의 律詩 “江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나이 50전후의 그에게, 무슨 病이 많았을까?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뇨병과 폐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池榮在 編譯 “中國詩歌選”). 요즘 세월에도 수월치 않은 病이라 그 고통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건강한 사람은, 病弱한 사람들의 고충을 잘 이해 못한다. 그보다 理解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게 옳을 게다. 筆者의 한 친구도 “넌 무슨 약을 그렇게 먹느냐?”는 핀잔을 던지곤 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튼튼하지 않은 처지가 서글프기도 했었다.
  입이 짧아서 반찬 투정을 하며 자란 내가, 남들만큼 튼튼할 理가 없는 건 당연하다 할 것이나,  왜 그렇게 목이 잘 붓곤 했는지(扁桃腺炎이란다)…? 걸핏하면 사나흘씩 드러눕곤 해서 어른들을 애 태우게 하곤 했던 세월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견디다 못해,  29살 때인가 수술로 편도선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늦가을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초여름의 더위가 시작될 때까지 도대체 몸과 마음을 편히 가져 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넌 어느 계절이 제일 좋으냐?”는 게 화제가 될 때는 “여름이 제일 좋다”는 대답은 나 하나이기 일쑤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치아로 인한 고통을 줄이려고 먹어 버릇한 Aspirin, 먼저 얘기한 몸살감기와 더불어 그동안 먹어온 Aspirin의 총량은, 나중에 친구들과 농담 섞어 한 얘기에서처럼 “아마 내 체중만큼은 될게다”라는 것이다. 많이 틀린 말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다. 요즘은 Tylenol 이 Aspirin 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 있다.
  中年에 들어, 속이 쓰린 일이 자주 일어났다. 아마도 Aspirin에 의한 소화 장애일 것이다 해서 위장약(주로 制酸劑)을 습관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그때는 또 血壓이 정상치를 넘곤 해서(어렸을 때부터 짜게 먹었으니 당연한 業報인가?) 혈압강하제를 常用하기도 했다.
  “理想은 높고, 抱負는 커라.”하는 어느 학교의 校訓 같은 얘기가, 現實與件과 맞지 않을 때의 心的인 갈등을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뭐 별로 내세울만한 목표나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일로 인한 갈등이, 피부에 두드러기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30代 초반, 그로 인해 항 히스타민劑(페니라민)가 항상 내 손 닿는 곳에 수행비서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그 가려움 증세는, 아직도 가끔 나를 심심치 않게 해주어, 모처럼 만나는 친구처럼 생각되면서 전같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만 해도 남들 이상은 되겠는데, 2001년 9월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아주 말할 수 없는 급작스런 腹痛이 일어났다. 急性膵臟炎이란다. 처갓집 조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울의 어느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올 때 누워서 내다보는 가로수가, 반대 방향으로 스쳐가는 걸 볼 수 있을까? 하면서 입원한지 보름 만에 가까스로 살아서 퇴원한 이후로, 삼시 세끼는 물론, 무슨 간식 때 마다도 膵臟酵素劑를 먹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약의 國內 생산이 중단됐단다. 요즘은 미국에 가 있는 친구들이 보내주고 있다. 친구들 신세를 계속 져 가며 살만한 가치가 있는 목숨인가를, 약을 받을 때마다 自問해 본다. 거기 덧 붙여서, 만성췌장염 치료제를 常服하면서, 췌장조직의 파괴로 糖尿病이 오지 않을까? 癌으로 발전하지 않을까?를 정기 검진 때마다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다.
  시골생활을 접고 스스로 은퇴發令을 낸 후, 서울집의 좁은 방 하나를 아지트 삼아 틀어박힌 지 몇 달이 안 된 어느 날부터 재채기와 콧물이 주체할 수 없도록 나를 또 괴롭히기 시작했다. 꽃가루인가? 서울의 탁한 공기인가? 방안에 미쳐 뭔가 알지 못하는 무슨 물질이 있나? 증세에 해당하는 Actiped라는 內服藥과 鼻腔噴霧劑등을 필요시마다 쓰기 시작했는데, 몇 달 후 일본 대마도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공기가 맑아서인가, 씻은 듯 증세가 사라짐을 느꼈다. 아! 이제는 치료가 됐나보다 싶어 좋아라 했지만, 귀가하자마자 도루묵! 그리고 연속이다. 뭔가 원인 되는 물질이 있긴 할 텐데, 아직 발견해 내지 못하고, 약만 대기시켜 놓고 수시로 복용중이다.
  또 있다. 언제부터인가 소변보기가 힘들고, 시원스레 나와 주지 않는다. 참을 만큼 참다가 드디어 병원에 가서 前立腺肥大症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매일같이 약을 복용해야지 안 그러면 소용이 없단다. 죽기 전까지는. 前에 혈압이 높은 것을 발견 했을 때 후배 내과 의사와 상담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혈압강하제를 쓰란다. 그럼 생전 써야하겠네? 라고 했더니, 그가 나를 정색하고 바라보며, “뭐 얼마나 많이 남았나요?”했던 일 말이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하자면 아직도 멀었다. 원래 조금밖에 먹지 못하니까 툭하면 변비가 되고, 음식이 맛있다고 조금만 넉넉히 먹으면 속이 감당을 못하고, 담배를 끊지 못해서인지 거담제가 필요하기도 하고, 義齒가 고장이 날 때는 잇몸이 상해서 아프고, 의치를 깨끗이 해야 할 때 필요한 洗滌劑 등등 말고도 이런 저런 外用藥의 열거는 이제 그만두기로 하자.
  이러면서도 살아야 하나?는 그래도 죽고 싶지 않다는 푸념의 또 다른 표현일까?  필자가 처음 마련한 집의 新築을 축하해 주려고, 어느 친구가 단아한 隸書體로 써서 만들어 준 액자에 담긴 “江村”의 한 구절이, 그런 저런 연유로 내 마음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 액자를 소중히 걸어 놓고 보고 있다. 그럴 때면 “약을 먹어 가면서라도 살아라 (多病所須唯藥物). 변변치도 않은 몸이 그거 말고 또 뭐?(微軀此外更何求)”하고 그 친구가 내게 詰問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돌이켜 보게 된 六 · 二五

  半世紀도 넘게, 예전에 겪은 6·25를, 새삼 곰곰이 되새겨 보게 하는 일이 최근 몇 해 사이에 있었다. 잊고 싶다고 어디 잊어질 일이겠는가? 다만 스쳐지나가는 세월이 남기고 간 부스러기들에 밀리고 눌려서 의식의 밑바닥에 잠들듯 內在했던 추억을 휘져어 올리는 듯한 자극으로, 다시금 머릿속을 점령하고 떠올랐던 것이다.

1. 의문의 전화 한 통화
 
  2003년 초가을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와 나를 찾는단다.
  “여보세요. 김○○입니다.”
  “전화 받으시는 분이 김○○씨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옛날 원효로에 살고, ○○중학교에 다니던 그 김○○씨 맞죠?”
  “예, 맞습니다. 원효로에 살았죠. 누구시죠?”
  “나 박양준(가명)입니다. 기억나나요?”
  “기억 하고말고. 당신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내가 충주에 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래 참 오래간만인데 어떻게 지냈어? 건강해?”
  공대말이 점차, 친구끼리의 平常의 말투로 내려갔다.
  때는 6·25사변 무렵, 원효로의 한 초라한 골목길에 살면서, 바로 몇 집 건너에, 시골에서 올라와 자기 형과 둘이 자취를 하며,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학년의 친구 박양준이었다. 그의 형은 우리보다 3, 4년 위의 나이로 기억되며, 언뜻 들은바 좌익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금은 거리감을 두고 지냈는데, 6·25 사변이 일어났고,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후 그 친구의 태도가 대뜸 활발해 졌다. 학교가 다시 열렸으니 함께 등교하자고 몇 번 권유를 받고, 노상 피하거나 거절만 할 수 없어서 (요컨대, 뒷탈이 두려워서) 함께 학교에도 가 봤지만, 이북의 군가(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나 가르치고, 투쟁의식만 고취시키고, 의용군에 지원하기를 권유하고……하는 분위기가 하도 살벌하게 느껴져서, 하루만 등교해 보고는 겁이 나서도 다시는 등교를 안했다. 수복 된 후 그의 자취는 의당 사라졌고, 그로부터 53년이나 지나서, 전화가 걸려왔으니…….
  “그래 어떻게 된거야? 어디 살고 있지?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언제부터 충주에서 살게 된거야?”
  “한 30년 됐지? 아니 충주에 내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서울엔 안와?”
  “자주 가지, 애들이 서울 살고 있으니까.”
  그간의 과정이야 어찌됐건 어릴 때의 친구인데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앞서서 물어보는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正鵠을 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한번 만나야 할 거 아냐? 할 얘기도 많은데…….”
  “그럼, 그래야지.”
  “내가 어떻게 연락해야 하나? 지금 어디야 도대체……?”
  “내가 또 연락할게. 나도 만나보고 싶으니까.”
  서둘러 자기의 현재 위치는 말 안하고 이러 저리 핀트 안 맞는 문답 끝에 전화는 끊겼고, 그의 마지막 말 몇 마디는 거의 울먹이는 어조였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끊겨버린 수화기를 바로 놓을 생각도 못하고 잠시 일손을 못 잡는 내 머릿속은, 사변 통에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어렸을 적의 級友들 얼굴이 그 박양준을 비롯하여 수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로부터의 전화는 다시는 없었고, 반세기가 넘는 동안의 그의 행적은 다만 궁금증으로만 내 머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동기생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나하나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함께 입학하여 같이 졸업한 숫자는 잘해야 절반 정도일까? 나머지는 학교에의 復校가 늦어 한두 해를 내려앉은 유급생, 그리고 타교에서의 전학생으로 짐작된다. 사라진 半數의 숫자를 “金日成이가 채워 주기도 한건가?” 싶은 생각에 쓴 웃음이 피어나고, 唯一하게 생존의 소식을 전해 온 그 박양준군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인다. 그가 兄을 따라 월북했다가, 近年에 모종의 지령을 받고 南派되어 왔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그 전화 한통화가, 호기심에 가득차서 이 세상에의 안목을 한창 넓혀가던 그 순수했던 시절, 감당할 수 없이 덮쳐 온 세월의 노한 파도에 의해 졸지에 잘려나간 그 시절에의 아쉬움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쟁의 本質 ( 6·25는 통일전쟁? )

  전쟁이 일어나고, 나흘 후 서울이 赤軍에게 함락되었다. 뒤늦게 길을 나섰다가 한강철교가 몇 발짝 앞에서 폭파되는 바람에, 피난을 못가고 남은 내 눈에 비친 북한군의 무기체계는 경탄스러웠다. 기본화기인 소련식 장총(일명 딱콩총)과 연발총(따발총) 그리고 重火器에 탱크 등 武裝체계는, 지금 생각해도 整然하고도 莫强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에 反해 국군에게는 탱크는 커녕, 개인 武器도 통일 되어 있지 않고 衆口難防이었다. 미군이 철수 하면서 인계하고 간, 후방 治安用의 칼빈총이 더러 눈에 띄었고, 日本軍의 무장을 해제 시킬 때 접수한 9·9式장총, 그보다 구식인 3·8식, 그보다도 더 구식인 4·4式총 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이니, 어느 편이 준비가 치밀했는가는, 바꿔 말해서 어느 편이 전쟁을 원하고 있었나는, 당시 14살 밖에 안 된 내 눈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정부의 단독결정으로, 駐日美軍의 한 개 부대가 서둘러 파견되었고, UN총회가 뒤이어 열렸다. UN의 승인을 받은 나라가, 그런 자격을 부여 받지 못한 세력의 침범을 받은 것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安保理 상임이사국 중 하나인 소련이, 유엔군 파병 결의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그 대표가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무슨 일이든 반대만 하고, 아무리 객관적으로 타당한 일에도 거부권을 밥 먹 듯 휘두르던 소련이(요즘의 어느 정치집단이 하는 짓이 어쩌면 그 때의 소련의 행동과 그렇게도 같은지……) 자기들이 무기를 대 주고 뒷받침을 하고 있는 북한군에 대항하는 군대 파견을 보고만 있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평생 내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게 됐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군사적으로, 또 외교적으로 많은 友邦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戰後의 복구사업에도 도움 된 바가 적지 않으니, 당시의 소련의 행동 그 한 가지만은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할런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 세상 다하도록까지 품고 있던 의문이 대강 풀리게 된 일이 있었다. 2007년도인가 8년도인가가 확실치 않지만, 어느 신문에 6·25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인즉, 現代史學者 몇몇이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만나, 한국전쟁의 性格에 관한 결론에서 대체적으로 合意를 봤다고 한다. 당시 스탈린은, 안보리 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국전에 매달려 있게 하고, 그 틈을 타서, 소련의 입장에서 보아 비중이 훨씬 큰 서유럽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하! 과연 그게 그랬던 것이었구나.” 그러니까 한국전쟁은, 소련이 노려왔던 世界共産化를 위한 前哨戰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을 미끼로 했다가 전세가 여의치 않자, 中共軍을 투입하면서 전쟁을 길게 이끌어 가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건 틀림없이 맞는 얘기라 하겠다.
  近年에, 어느 대통령이 “6·25는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고 했다. 역사상, 이 나라에 네 번의 통일전쟁이 있었는데, 6·25만이 유일하게 실패한 사례라는 것이다. 글쎄 그럴까? 당시 소련의 입장에서,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의 통일만을 위해 그 많은 무기를 지원 해 줬을까? 안보리에서의 거부권 행사 포기는 왜 했는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이 겨레의 희생은, 그러니까 反統一이었나? 그런 말을 한 時點은, 세계적으로 共産主義가 自体모순으로 거의 다 망쪼가 난지 오래인데, 그래도 김일성 일당이 저지른 행위를, 그렇게까지 美化하는 底意가 무엇인가?
  틀린 얘기도 표현이 그럴듯하면 속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참 어이없는 얘기다. 日帝가 물러간 폐허 위에, 깃발만 꽂다시피 나라를 세운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주제에, 무슨 재주로 통일을 꿈꿀 엄두나 냈겠는가? 소련의 연방이 해체되기 전부터, 간간히 공개되어온 문서를 종합해서 전해온 얘기라던가, 연방해체 후 공개 된 문서와 사진 등에서,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는 내용까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市井의 匹夫에 불과한 나도 알게 된 일을, 시침 뚝 떼고 국민을 기만하는 그 鐵面皮한 배짱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건대, 6·25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미국, 기타 국가의 반응을 시험해 보기 위해, 김일성을 미끼로 이용한 전쟁이라는 게 옳은 시각이다. 미끼로 던져진 김일성이가, UN군 파병 결의안을 전해 들었을 때의 표정이 어떠했나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약소국가에 태어나, 일제하의 고통, 해방 후의 분단과 갈등, 미증유의 전쟁의 참화와 그 후유증 등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아 온 한 평생이 恨스럽기 짝이 없다.

3. 맥아더 장군 銅像

  2008년 늦여름 어느 날, 대학 동창들끼리의 어느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인천의 China town에, 나들이 비슷한 探訪을 갔었다. 주로 山東省에서 출발하여 가까운 인천항에 첫 발들을 디딘 그들, 이 나라에 처음으로 이룩한 그들의 마을이, 세월의 우여곡절 끝에 흔적이 희미해진 것을, 近年에 작은 규모로 나마 復元하고, 保存 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하겠다. 元祖 中國式 식당이라는 곳에서 맛본 점심식사도 즐거웠고, 孔子의 立像이라던가, 三國誌를 축약한 벽화도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보다 그 근처의 자유공원 언덕위의 맥아더 장군 동상이 내게 주는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實物보다는 확실히 크게 느껴진 동상은, 먼 곳을 無表情하게 응시하면서, 망원경을 힘 있게 쥐고 있었다. 즐겁거나 초조하거나 하는 감정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담담한 표정은, 평생 군인의 길만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風波를 겪어 온 사람 같지 않게, 그의 순수한 內面을 表出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등을 떠 올리면서, 그 분을 비록 死後에 銅像으로나마 만나보고 있는 내 마음 속은, 한없는 존경과 감사의 念을 억제 할 수 없었다.
  주위의 모두가 의아해 하는 仁川上陸作戰을 구상하고 성공시켜 戰勢를 단숨에 역전시킨 그의 공로에 보답코져, 銅像으로나마 감사함을 표한 정성이, 내 이 조그마한 마음과 같았던 것이겠다.
  그동안 頭序없이 주워 읽은 회고록 등에서, 그의 인천상륙작전은, 二次大戰 때 그가 行한 太平洋작전에서의 “징검다리 건너뛰기”作戰을 轉用한 것이라고 들었다. 즉 日本軍이 점령하고 있던 몇몇 섬을 뛰어 넘어 앞쪽을 차지하여, 뒤쳐진 적군에의 보급로를 차단하면, 그 뒤로는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고, 바로 이 原理를 仁川上陸에 應用한 것이란다. 보급로는 커녕 退路마져 위협을 당한 北韓軍이 황망중에 서둘러 退却한 것은 새삼 再論할 必要도 없겠고, 이 과정에서 이 나라의 많은 百姓이 拉北의 위기에서 구출되었다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내가 그들의 治下에서 뼈저리게 느낀 일이다. 그때 우리 동네를 주름잡던 소위 “바닥 빨갱이”가 늘 우리 주위를 서성거리고, 동네 사랑방 비슷한 곳을 느닷없이 덮치고 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당시 30代의 稅關員이었기 때문에 하루 한시도 마음을 놓고 지낸 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 한 공포의 세월을, 그나마 무사히 살아 넘긴 공로의 大部分은, 전쟁의 時日을 단축시켜준 將軍의 덕분으로 치부하여, 지금껏 그 마음이 변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이 비단 우리집 한 곳에만 해당되는 말이겠는가? 전쟁에서 소모된 인원을 채우노라 血眼이 돼 있던 저들이, 웬만큼 젊은 남자들을 보는대로 잡아가는 것을, 학교에서 거리에서 무수히 경험하였으니…….
  그런데 近年에 反美主義者들이 將軍의 동상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경찰과 몸싸움도 있었다던가? 여론이 들끓게 되고 全國民의 관심사가 될 즈음, 대통령의 한 말이 더 한심스러웠다. 여론의 向方에 맡길 일이라는 것이다. 及其也는 6·25 참전용사들이 老軀를 이끌고, 肉彈戰이라도 벌여 막겠다고 나섰다. 하늘아래 이렇게 창피스런 일도 있는가? 이 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은공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나라가 됐는가? 심지어는 미국의 참전용사들이, “정 그렇게 없애겠다면 그 동상을 우리가 모셔가겠으니 파손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참으로 부끄러움의 極致라 하겠다. 그런者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는 것이 참으로 치욕스럽다.
  미아리 언저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젊은 남자들이 줄줄이 묶여서 北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전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의 애끊는 사연을 유행가에서까지 읊었겠는가? 기억나는 대목을 소개하면,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며 날뛴者들의 많은 수는, 장군이 그들의 애비, 할애비(끝머리에 상스런 표현을 삼가 용서 바란다)를 구해주셨다는 것을 나는 큰소리로 말해 주고 싶다.
  “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는 말을 남기고, 現實舞臺의 뒤로 사라져간 장군은, 그의 말대로 내 가슴속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將軍이시여! 바라옵건데, 이 나라의 어리석은 백성들의 妄動을 그냥 못 본 체 해 주옵소서.”

大統領의 言動


  “재산이 있어서 마음 든든하다거나 행복하다기 보다,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市井雜輩가, 잘 사는 이웃이 망하기를 바라고 내뱉은 악담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稅金폭탄을 예고한 말이다. 당연히 국민들 간에 曰可曰否가 되었고, 그 말이 겨냥하는, 부동산 가격이 비싸다는 강남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주민들의 마음이 불편해 지고, 그리고 反論 비슷한 여론이 일자, 재차 한 말이 “흥, (앞으로) 세금한번 내 보시라.(맛이 어떤지……)”라고 했다. 家計에서 쪼개가며, 納稅의 의무를 다해가면서 국가를 지탱해 주는 국민에게 대통령으로서, 이렇게 비아냥 섞인 위협적인 말을 해서 될 일인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세금을 더 걷어야 했다면, 세금을 감당해 줄 국민에게 먼저 간곡하게 양해를 구해야 옳은 것 아닐까? 여기에 편승하여, 어느 얼빠진 각료는 “세금이 걱정되면 강남의 집을 팔고, 분당으로 가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참으로 한심한 者들이다. 국민의 사기를 이렇게까지 짓밟아도 되는 것인지, 이 나라의 국민이 된 자부심은 커녕, 어쩌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이런 꼴을 겪는가 하는 절망감까지 가지게 된다. 요컨대, 강남을 비롯한 몇몇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가 투기꾼들이라는 발상이리라. 그러나 투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투기꾼과 선량한 국민을 구별해야 하는 것은 행정당국이 할 일이고, 그런 투기가 성행했다면 그것을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당국에게 있는 것이지, 거기 사는 국민이 몽땅 짊어질 일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이 한 말 중에 “이 나라의 現代史는 기회주의가 득세한 과정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더욱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현실에 만족 못하고, 불만이 쌓여 있는 많은 사람들이, 때마침 유행하게 된 인터넷인가 하는 疏通手段을 매개로 하여, 군중심리로 변질되어 폭발한 민심에 편승하고, 교묘히 이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욕설과 상말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종의 카타르시스는 되었을지는 모르나, 그곳에 보편타당한 理性이 존재했다고 보는가? 그러한 군중심리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대통령의 신분임에도, 그는 저질스런 언사를 거침없이 내뱉었는가? 누워서 침 뱉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재로 결정된 여러 가지 정책을, 후임자가 고치지 못하도록, “대못질을 해 두고 싶다.”고도 했다. 자신이 한 일은 다 옳다는 뜻인가? 그렇게 자신 있게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옳은 일을 했는데, 왜 그 무리들은 선거에서 죽을 쑤고 주저앉았는가? 그들이 주장해 온대로 서민대중을 위해 정치를 했다면, 어째서 많은 서민들은 그와 그의 무리들에게서 등을 돌렸는가? 한 가지 분명한 例로 정부기관의 기자실을 “대못질”하고 나갔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다시 원상복귀된 것을 보면, 民心이 정권 바뀔때만 기다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도 그와 그의 무리들은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아니, 그런 걸 기대할 수도 없다. 그는,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이 나라의 헌법을, 욕설로 대하기도 하는 人格이니까 말이다.
  日帝의 사슬에서 놓여나고 나라를 세운 기념일인 光復節을, 建國節이라고 고쳐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다. 타당성 여부는 국민의 여론에 따라 결정할 일이나, 개인적인 贊反은 자유로운 나라이다. 그러나 전직 대통령이라는 者가 한 말은 어이없기 짝이 없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국토 분단 상태에서 건국하는 것을 반대했다.” 고 말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에는, 語感上 大多數라는 의미로 들리게끔 얘기했는데, 실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그 無識함에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반세기 이상 사용해 온 광복절이라는 단어가 이미 친숙해진 마당에, 새삼스레 생소한 어휘로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하면 되지 않았을까? 그의 속마음은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否定하고 싶은가 보다. 그때 건국에 반대한 많은 사람들이란, 바로 赤色분자(속칭 “빨갱이”)가 主流였다는 걸 모르는가? 法律을 공부했다는 者가, 당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90% 이상이 투표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알았다면, 10%미만인 숫자가 “많은 사람”이었는가? 本心이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나라의 대통령을 하려고 동분서주했는가? 몇 년 전, 중국 黃山에 여행갔을때, 동행한 인솔자가 우리를 주의시키던 말이 생각난다. 그쪽의 현지 가이드는 대부분 만주쪽에서 취직되어 온 동포인데, “머릿속은 南쪽이지만, 가슴속은 北쪽.”이라고 했다. 앞의 말은 計算的, 뒤의 것은 本能的이라는 뜻으로 알아 들으면 된다. 요즘의 대통령이라는 者들의 행적을 떠올리면, 그때 그 말과 자꾸만 겹쳐지곤 한다.
  2002년 6월 29일에 일어난 사건은, 아마 당시의 대통령직에 있었던 者로서도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것이다.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쪽 어선들을 따라, 북한 경비정이 내려왔다. 당연히 국군통수권자에게 보고가 되었고, 그는 “저쪽의 의도가 파악될 때까지 먼저 쏘지는 말라”고 했다나? 至近거리에서 선제공격을 당하고 장병 6명이 죽었다. 위협사격이라든가, 다른 적절한 조치가 없지 않았을테지만, 최고위층의 잘못된 판단으로 어이없는 희생을 당한 것이다. 그로부터 하루도 안 지나서, 대통령은 월드컵 축구 결승전을 觀覽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고, 그 후로도 장병들의 영결식을 비롯하여, 매년 추모식이라든가 하는 의식을 깡그리 외면했다. 나라의 최전방을 지키고져 했던, 그들의 비장한 희생은, 최고 사령부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한 결과가 되었다. 草綠은 同色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나? 그 後任者는 한술 더 떠서, “NLL을 영토선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NLL을 설정할 때 연합군측은, NLL설정에 合理性을 부여코져, 이미 점령했던 北側 연안의 여러 섬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NLL은, 우리도 저들도 서로 넘어서는 안될線으로, 半世紀가 넘도록 관습적으로 지켜져 왔던 것이다. 지금와서, 이걸 대통령이라는 者가 허물려고 하고 있다. 나라의 영토는, 그것이 물이건 뭍이건 간에, 백성의 것이지 대통령 개인의 것이 아니다. 서해교전 당시 희생된 韓중사의 부인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미국으로 떠났다.
  금년 봄인가, 한강 下流의 행주대교 근처의 강바닥을, 미국측에서 뒤지는 일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비행기 추락으로 희생된 탑승자들의 시신을 찾기 위함이란다. 58년 전의 일이다. 그들은 북한에서도, 베트남에서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런 작업을 계속하는 취지의 말을 듣고는, 잠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亡者)이 집에 돌아올 때 까지(Until they're home)"란다. 죽은 사람이 제 발로 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을 때까지”가 맞는 말이겠다.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너무 다른 얘기 아닌가?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後記>
  일일이 들춰내자면,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言動이 그것뿐이겠는가? 余生이 얼마 남지 않은 내 나이지만, 부디 바라건대, 외국과 견주어도 결코 밑지지 않는, 누구말대로 “깜이 되는” 대통령이 그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1. 多病所須唯藥物
2. 다시 돌이켜 보게 된 六 ·二五
3. 大統領의 言動
4. 대화의 양념, 재치와 유머
5. 登山과 山菜
6. 사투리 단상
7. 体 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