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홍덕 글 모음 - 2

대화의 양념, 재치와 유머

 

  얼마 전에 있었던 國會의 對政府質疑에서, 질문자와 國務委員간의 問答內容이 TV에서 중계된 일이 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전부터 막연히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되었다.
  질문자의 말투도 썩 매끄럽지 못했지만, 어느 답변자의 반응도 어쩌면 그렇게도 험악했는지, 국회라는 무대가 아니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 국민의 話術이 너무도 서투른 것이 못내 아쉽게 생각되었고, 그런저런 모습이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自省의 계기도 되었던 것이다.
  듣기 싫은 소리도, 기술적으로 우아하게 받아넘길 줄 아는 지혜가 아쉽게 느껴지면서, 전부터 어디선가 읽고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외국의 사례를 꺼내서 비교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재미도 있으려니와 부러운 생각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첫째, 일본의 의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의원이 연설을 시작하는데, 그는 불행히도 한쪽 눈이 실명상태인 불구자였다. “에~또 오늘날 세계정세를 널리 살펴 보건데~”라고 시작하자, 반대당의 어느 의원이 “이봐, 한쪽 눈만으로도 세계가 넓게 보이나?”라고 야유를 날렸다. 연설의 당사자는 태연한 얼굴로 흘깃 그 야유자를 한번 보고 마로 대답하기를 “一目瞭然! 몰랐어? 몰랐으면 공부를 좀 더 하셨어야지…”그러니까 야유를 했던 측은 무식한 의원으로의 자격이 의심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영국의 의회에서의 일이다. 교육관계의 위원회에 장관이 출석하여 얘기를 시작하는데, 야당의원 하나가 “장관님, 장관님께서는 혹시 본직이 수의사가 아니십니까?”고 질문을 하며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수의사 따위가 뭘 안다고…”하는 비아냥이 섞인 말투라는 것을 간파한 장관이 즉시 대답하기를 “그렇소. 내 본직은 수의사요. 그러니 아무 때라도 좋소, 혹시 몸이 어딘가 아프면 내가 봐 드리리다.” 시비를 건 측은 졸지에 수의사의 진찰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셋째, Winston Churchill의 얘기라고 기억되는데 정부에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는 일로 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야당 대표의 반대 취지 연설의 要旨는 이렇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기구를 설치하고 져, 많은 예산을 요구하면서 국민의 부담을 키우고…, 이것 하나가 커지면, 따라서 커지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니 이게 겁나는 일이다.”는 것이었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갔던 Churchill이 볼일을 마치고 바지춤을 바로 잡는 찰나, 그 야단대표가 들어왔다.
  Churchill이 나가려니까 야당대표가 “왜 내가 겁나서 서둘러 나가십니까?”하고 빈정거렸다. Churchill이 대답하기를 “아니 그게 아니고, 큰 것을 겁을 내시니까 혹시 놀라실까봐서…” 뭐가 어떻다구? 하는 잠시 후 폭소가 터지고… 그 직후 Churchill이 제안한 기구의 설치는 양자의 원만한 절충과 피차의 양보 하에 무난히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대개의 우리 국민들의 대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술이 아닌가? 싸움을 걸어오는 쪽을 한 순간, 한마디 말로 힘을 빼버리는 지혜…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는 재치 등이 과연 부럽지 않은가?
  정치 얘기만이 아니고 실제로 경험한 얘기도 있다. 95년도 여름에 박승균, 손기용, 김진호, 심영보,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부부동반으로, SEATTLE에 모여서 Canadian Rockies 여행을 한 일이 있다.
  미국사람들과 섞여서 Bus Tour를 하는 중에 사귀게 된 어느 할머니가 집사람과 함께 앉아서 아내의 반지, 목걸이 등을 가리키며 좋아 보인다느니, 누가 사줬냐는 등등의 얘기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겠는데 이럴 때 뭐라고 응답해야 이 나라 풍속에 맞는지는 알지 못해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는 정도의 반응밖에 할 수 없었다.
  그 할망구가 답답했던지 Mrs.박에게 자리를 바꾸기를 청한 후 “이 나라에서는, 자기가 가진 물건을 세 번 칭찬을 받으면 그걸 빼주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저 여자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했다나? 당황한 Mrs.박… 대답이 궁한 나머지 얼른 “우리 한국에서는, 가족끼리라면 혹시 모르지만, 다른 사람과는 별로…”라고 하자, 그 할망구 즉시 “그렇다면 저 여자를 내가 入養하겠다”고 해서 한바탕 배꼽 빠지게 웃은 일이 있다.
  ‘痴者가 多笑’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있다. 자주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하면, 좀 변변치 않은 놈으로 취급하는 게 우리 풍습이 아닐까? 그러나 체통을 잃지 않으면서도 주위를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유머는 아직 그 방면에 익숙해 있지 않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연구, 발전시켜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어서까지 유머를 남긴 일이 있다. 영국의 극작가 Bernard Shaw는 Wit라든가 독설가로도 이름이 높다. 그는 생전에 유머, 또는 독설 등을 그의 작품 못지않게 많이 남기고 있지만, 죽어서 墓碑銘까지도 자신이 남기고 간 것이다. 墓碑銘에 가라사대 “내 오랫동안 우물거리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I knew, if I stay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재미있다기보다 마음속이 숙연해지는 wit라 하겠다. ‘어떠어떠한 공적을 쌓고 이러저러한 선행을 한 아무개가 여기 잠들다.’하는 그러저러한 묘비명과 비교해 보라…. 죽음까지도 장난스럽게 생각하는 境地가 부러울 뿐이다.
  ‘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도 우리나라에 있지 않은가? 노한 것 같은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대하는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것을 누군들 모르랴…
  유머러스한 말을 익히고 쓸 줄 아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犯法者를 대하는 듯한 근엄한 얼굴표정 말고 웃는 얼굴, 사람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익살 섞인 말 등에 익숙해지자고 하고 싶다.
 



登山과 山菜


  한동안 즐겨 어울리던 tennis동료들이 거의 전부가 골프로 돌아섰다. 시간과 거리, 그리고 주머니 속 형편 등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주춤주춤 머뭇거리다가 그만 골프와 인연을 못 맺고 말았는데, 그것이 친구 잃고 취미 생활도 잃은 셈이 되어 버렸다. 혼자, 여행에 관한 책이나 보며 지나던 중 며느리를 맞게 되었는데, 주말마다 만나보러 上京하는게 취미생활을 대신 해 주다 싶이 했고, 게다가 손녀가 태어난 후로는 더 열심히 주말 上京을 했다. 어찌나 예쁘던지 ……. (필자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애기들이라면 남의 집 애기도 좋아했다. 어렸을 때 부터도. 하물며……)
  그런데 하루는, 집사람이 또 서울행을 준비하고 있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여보, 주말마다 애들을  붙들고 자유를 뺏으면, 나중에 (그러니까 늙고 힘 빠졌을 때) 며느리한테 좋은 대접 받겠수?” 한 껏 부드럽게 하는 말에도 섬뜻함을 느꼈다.  옳거니! 汝言이 是也로다. 서울 대신 앞집의 군대 동기생 李선생을  찾아갔다. 등산을 거의 밥 먹듯 한다는 그에게, 나 좀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때부터 근처의 산을 정신없이 오르내렸고, 그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으로부터 시작한 白頭大幹 줄기가, 바로 내가 살던 忠州의 한쪽 辺을 스쳐지나가면서, 그 근처에 수 많은 名山을 마련해 주어서, 주말마다 이름 있는 산을 한군데씩 가 본다 해도, 다 가보려면, 줄잡아 2년은 걸릴 정도이다. 한창 잡념 없이 등산에 몰두해 있던 어느 봄날, 동행하던 林교감이라는 분이 “김선생, 이거 뭔지 아시나?” 하고 풀잎 하나를 건네준다. 의아해 하는 나를 보고, 냄새 한번 맡아 보란다. 독특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게 바로 취나물이란다. “아! 그 말로만 듣던……?” 잎의 모양새가 독특하여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바로 그날 山行의 목표였던 積宝山의 山頂에 그 취나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던 것이었다. 앞집 이선생, 임교감, 그리고 동행했던 金면장 등이 달려들어 뜯기 시작했다. 어째야 하나? 하고 망설이는 날 보고, 그 발밑에 있는 게 모두 취나물이니까 빨리 뜯으란다. 그럴싸한 놈을 골라가며, 남들이 채취한 量의 4,5분의 1인가를 긴가민가 하면서 집에 가져왔는데. 집사람이 반색을 하고 놀라면서 어디서 났느냐고 한다. 그날 있었던 얘기를 대충 들려 주면서, 해가 저물어서 더 이상 못 뜯고 내려왔다고 하니까, 당장 내일 함께 그곳엘 가자는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취나물에 재미를 가지기 시작해서, 해마다 봄이면, 우선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차차 높은 곳으로 그 놈을 찾아 다니는데, 대게 5월 중순에서 6월 상순쯤으로 끝난다. 그 다음에는 뻣뻣해져서 식품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만다. 그러는 과정에서, 夏雪山의 능선 한곳에 말할 수 없이 많은 취나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 높은 곳이어서 나물 채취를 목적으로 그곳까지 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곳이라, 매년 봄 날짜를 정해서, 한 짐씩 지고 내려오곤 했다. 수안보 온천 마을에, 임교감 재직시에 학부형이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단골로 정해서, 산행에서 돌아 올때 의례 저녁식사를 하던 곳이었다. 식사중에도 하도 취나물 얘기를 늘어놓고 광고를 하니까, 그 아주머니, 나도 한번 데려가 달란다. 그 양반은 식당손님들에게 내 놓는 반찬에, 사시사철 산나물을 내 놓는 입장이라, 그런 물건은 多多益善이었으니까…….
  약속한 날 너댓명이,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두어시간을 쉬엄쉬엄 올라가 드디어 취나물 밭에 도달했다. “ 여기서부터가 그곳이라”고 그 아주머니에게 말을 하는 둥 마는 둥, 엎드려 취나물을 그저 주워 담다 싶이 하기를 거의 한시간, 그런데 그녀는 별로 취나물을 뜯지도 않으면서, 가지고 간 쇠꼬쟁이로 이것 저것을 들쳐보면서 뭘 골돌히 살피고 있는 것이다. 내야 뭘 아나? 그저 안다는게 한가지 밖엔 없으니까……. 하고 정신없이 내 할 일만 하고 있는 뒤편 2m쯤 되는 곳에서 그녀가 하는 말, “어머! 인삼이네.” “아니 뭐야? 누가 심어 놓은 것도 아닌데, 이 산중에? 그럼 그 귀하다는 山蔘이란 말야?” 뒤를 돌아다 보니 방금 내가 지나온 곳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아이고 아까운거” 뭐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뭘 알았어야 아쉽다거나 놓친 게 분하다거나 할 게 아닌가? 그날 그 아주머니는 산삼 두 뿌리를 그 자리에서 캐냈다. 우리는 모두 그의 안목과 행운에 박수를 쳐서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그 산삼을 시아버님에게 달여 드렸다던가?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 봄에 재수, 삼수를 거듭하던  그 집 아들이, 서울의 어느 의과대학에 합격을 했다는 말을 그 아주머니에게서 직접 들었다. 이게 어찌 남의 일이라고만 넘길 일인가?  나는, 내가 그 고장에 살게 된 것, 등산을 즐기게 된 것, 취나물을 알게 된 것,  그날 동행을 한 일행들을 사귀게 된 것 모두를 나의 행운으로 생각하고 가끔 회상하곤 한다.
  올 봄엔 어째 몸이 안 좋은 날이 계속되어, 산나물 뜯으러 갈 엄두도 못 내면서, 건너편 산에, 松花(이것도 훌륭한 채집거리다.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가 누렇게 날아가고 있는 것만 보여 못내 아쉽다. 올봄도 눈앞에서 지나가고 있는데(今春看又過), 돌아갈 해는 과연 언제인가? (何日是歸年)하고 杜甫는 말했지만, 돌아갈 歸자 대신, 나는 행할 行자를 쓰고 싶다. 언제 산나물 채취를 갈 수 있을까? 라고…….

<後記>
Ⅰ. 임교감과 그 아주머니가 또 산나물 채취를 갔었단다. 나물 뜯는데 열중하다보니, 서로 떨어지게 됐는데, 임교감이 어떤 식물의 꼭지를 뜯어가지고, 그 아줌마를 찾아와서는 “이거 혹시 인삼 아니오?” 라고 했다나? 아줌마가 기겁을 하고 놀라서, 그거 어디서 땄느냐고 하며, 둘이서 그 자리를 2시간인가를 찾아 헤매고서야 그 인삼(그러니까 산삼이지)을 찾았대나 어쨌대나 하는 말을, 얼마 후 그 식당에 들렸을 때 전해 들었다. 그 얘기를 전하는 아줌마는 얘기하며 웃으며, 눈물과 침을 닦노라 노상 얼굴의 반은 가린 상태였다. 임교감이 “이런 말은 딴데에는 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면서…….

  Ⅱ. 그 아주머니는 姓氏도, 항차 이름도 모른다. 다만 영업장소는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 774-1번지, 商号는 “수안보 느티나무가든” 이고, 전화번호는 043-847-4676이다. 그곳은 산나물 반찬이나 버섯찌게등이 逸品이다.
  가을철에 혹시 송이버섯등의 가격이 싼 해가 드물게는 있는데, 이집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근처에서 채집한 싱싱한 버섯을 구하기도 했다.
사투리 단상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로 기억되는데, 당시 아버지가 購讀하시던 연합신문에, 조그맣게 ‘영남사투리’라는 난이 있었다. 써 있기를,
  “도라도라 캐싸도 니 줄끼 머 있노? 꼬장은 매바실코, 토장은 내미나고, 폿죽도 실타카마 머슬 주먼 묵을라노…?‘(달라달라 해도 너 줄것이 뭐가 있냐? 고추장은 매워서 싫고, 된장은 냄새 나고, 팥죽도 싫다면 뭘 주면 먹을래…?)
  내가 영남 쪽 사투리를 처음 대한 내용이다. 하도 귀에 설고 신기하기도 해서 아직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아버지 직장(서울시청)의 직함에 의해, 장충단 공원에 설치된, 이북 피난민 수용소에서 거의 함께 생활하면서, 이북, 주로 평안도 사투리를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왔던 시절이다.
  그 후, 중·고등학교를 부산 피난 시절에 4년 가까이 지내면서, 그 쪽 말씨에 꽤나 익숙해졌고, 당시 가깝게 어울려 지내던 8명인가의 친구 중에, 함경도 출신이 4명이나 되던 것이 계기가 되어, 또 그쪽 말씨를 접할 기회도 있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 이야기부터 해야 옳을 것 같은데 순서가 뒤바뀌었나 싶다.
  태생은 서울인데(아버지쪽), 어머니는 황해도가 고향이시다. 기억이 닿는 한의 어린 시절부터, 외할머니와 作故하실 때까지 함께 생활했으니, 말씨가 그 쪽 것이 많이 섞여 있게 되었고, 일제 시대에 총독부의 소개 정책에 의해, 충북 옥천 땅에 가 살면서, 거기서 말도 배우고 3학년을 마칠 때 까지 있었으니, 충청도 말씨도 간혹 무의식중에 섞이게 되었으리라….
  이러구러 대학에 진학했을 때, 바로 옆집에, 소설가를 지망하던, 2년쯤 선배 되는 사람이 있어서, 그로부터 많은 문학작품을 소개받아 읽은 일이 있고, 그중 金思燁교수의 ‘春香傳’의 내용에 기재된 호남 사투리의 재미에 빠져 들면서, 그 쪽 말씨를 예습할 기회가 있었고, 군대 제대 후, 光州에서 1년 반 살게 되어, 그 사람들에게서, 살아 있는 사투리를 들으며 실습할 기회가 있었으니, 제주도 사투리만 빼 놓고는 상당히 여러 군데의 말씨를 적어도 알아듣게는 된 셈이다.
  어떤 고장을 여행한다면, 그 곳의 風光과 음식과 그리고 특징적인 사투리 등이 어울려, 그 고장의 特味를 吟味하는 기회가 됨은 周知의 사실이다. 해당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은, 모처럼의 향수가 되살아나는 순간이 될 테고, 생소한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맛을 접하는 신기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호기심으로 몇 마디 그 쪽 말을 해 보는 것도 재미스럽고, 간혹 “고향이 이 쪽이냐?”는 말을 들을 때는 속으로 간지럼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日常을 무덤덤하게 지나기보다, 약간씩의 장난끼라고 양해해 주기 바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어느 고장 사투리건, 話者와 相對가 확실하게 그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되지 않는 경우,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어느 지역에 가서 그 쪽 말을 한다는 것이, 다른 고장 말을 하는 혼란이 있을 수 있다. 평안도에 가서 집에서 기르는 거위를 ‘당아니’라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 그건 황해도 용어인 것으로, 평안도에서는 ‘게사니’라고 한다.
  둘째, 같은 말인데도 지방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다른 것도 있다.
  ‘아재’라 하면,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아저씨로 듣는데, 함경도에서는 그것이 ‘아주머니’인 것이다. “요 건너 파랑대문집 아재가 바람났대.”하고 쑤군대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줌마가 어쨌다고 듣게 되고, 그것이 큰 싸움의 불씨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더욱 더 내가 “아~ 사투리 시늉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하고 긴장하게 된 일을 소개하면서 얘기를 마무리 지을까 한다.
  호남지방에 “빠구리를 친다”라는 말이 있다. 뜻인즉,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 허락 없이 내 빼는 것을 뜻한다. 어디 놀러 가거나, 극장 구경을 가거나 하는 거겠지…
  그런데 영남에도 똑같은 말이 있는데, 그 곳에서의 의미는, 성행위를 가리키는 卑俗語인 것이다. 좁은 땅에서 어쩌면 그 뜻이 이렇게도 다를까? 실제로 겪은 일인데 같은 말인데도 영·호남의 차이가 이렇다는 것을 이상의 예를 들어서 얘기했더니, 부산 출신의 어느 동료가 “그 말이 정말인지 집에 가서 확인해 봐야지”했다. 부인이 전주 출신이라나…? 다음날 그가 집에서 있었던 얘기를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보래이, 당신 빠구리라 카는 말 아나?”
  “알재, 학교 때 솔찬이 했지라…”
  (아니 뭐가 어째? 잠시나마 이쪽 저쪽에서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내며 마음속의 중심을 잡아가려는데)
  “고놈이 말이여. 너무 자주 할꺼는 못 돼야도 재미는 있어 잉?”
  “머, 머라꼬? 니 시방 머라캤노?”
  (익숙치 않은 의미의 차이를 깨닫고 무너지는 중심을 잡을 수 있기까지는 아주 잠깐이라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해서 사투리는 문학 작품의 한 부분으로서, 많은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해당 지방 박물관에, 지방문화재의 한 부분으로 소중하게 간직될 일이고, 함부로 外地에서 쓸 일은 아니지 않을 까 생각하게 되었다.

体 重


  나라 경제가 好轉되고 食生活이 向上된 지 꽤 여러 해 되었다. 많은 국민의 건강이 좋아진 것은 환영할 일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필자의 생각에도, 요즘 우리 국민의 体格이, 특히 학생을 주로 해서 젊은 층들을 유심히 볼 때, 아마 단군이래 제일 훌륭하지 않나 싶다. 体力은 國力이라는 말도 있으니, 國民 個個人은 물론, 나라 전체로 보아도 크게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作用이 있으면 反作用이 있고, 陽地는 陰地를 수반한다던가? 그전에는 別로 하지 않던 걱정을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으니, 바로 “체중이 너무 나가 걱정이다”라던가,  “살을 뺀다” 등이다. “다이어트”라는 외국어가 그냥 우리말처럼 들리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糖尿病이나 高血壓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데 그것을 “西歐型病”이라고, 남의 탓인 양 표현들 하지만, 대개는, 遺傳이라든가 다른 誘因이 있을 수도 있으나, 필요이상 많이 먹어 버릇해서 생기는 병인 것이다. 당연히 몸무게가 늘게 되고, 그게 과하다 보면 병으로 발전하는 것은 정해진 순서라 하겠다.
  適正한 体重을 말 할 때, 標準体重이란 말을 쓴다. 신장(cm)에서 100을 감한 수치의 90%가 대략의 標準体重値란다. 가령 키가 170cm이면, 100을 뺀 70의 90%, 즉 63kg정도가 그 신장에 해당하는 標準体重이고, 여자의 경우는 약간(1~2kg) 덜 본다. 이 標準体重에서 얼마나 벗어나느냐에 따라 본인이 조심하면 될 정도냐,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냐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筆者의 경우는, 時流와는 반대다. 모두들 体重이 너무 나가서 걱정인데 반해, 標準体重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 문제다. 어렸을 때부터, 키도 작았으려니와 몸도 왜소하여, 건강이 제일 좋았다고 할 수 있었던 때에도 標準体重이 됐었는지 아닌지…… 뭐 그 정도다. 원래 少食이라 어지간히 잘 먹어도 별로 늘지 않았고, 반면, 웬만큼 심한 몸살감기를 앓아도 1kg이상은 줄지 않았으니까 본의 아니게도 체중조절은 잘 돼온 셈인가? 그런 이유로 “날씬하다” ( 남자가 그 말 듣고 좋아할 일인가는 의문이지만 ) 는 말을 의례 들었고, 은근히 싫지 않기도 했다. 누가 말라깽이라고 흉이라도 볼 때면, “少食하면 오래 산다.”는 通說을 들어 반박도 하였고, 좀 뚱뚱한 사람이 밉상을 떨 때는 “호랑이가 너 만나면 반가워하겠다. 먹을 게 넉넉하니까.”하고 악담 비슷하게 되받기도 했다.
  이러한 平素의 내 생각이 조금은 심각하게 변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2001년에 갑자기 찾아온 急性膵臟炎이었던 것이다. 보름쯤, 입으로는 물 한 모금 못 먹고 지낸 후, 퇴원 해 보니, 그 변변찮은 체중에서도, 거의 6kg 가까이 줄어있었다. 퇴원할 때 담당의사로부터 들은 주의사항 중 제 1 항목이 “배부르게 먹지 말라”였다. 그러니 빠져나간 몸무게를 되찾는 게 수월했겠는가? 어찌 어찌해서 1kg정도 형편이 나아졌는가 싶었을 때, 齒牙 고장으로 義齒만으로 살게 되었다. 그대로만 살수 있다면 아쉬운 대로 지낼 만 할 텐데, 그 義齒가 고장이 나면 잇몸이나 입천장이 계속 아프다. 그럴 때는 식사시간 외에는 빼놓고 지내게 되는데,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식욕을 잃게 된다. 다시 한 2kg이 빠져 나갔다. 어쩌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의 내 몰골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지난해 가을인가?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함께 다닌, 잘 아는 친구가, 오랜 암투병 끝에 他界했다. 동창관계의 여행에 同行을 하기도 해서, 안사람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다. 조문을 가서 그 부인을 뵙고,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하겠습니까?”하고 어물어물 인사를 드렸을 때, 그 부인이 내 양어깨를 잡고, 조금은 흔들면서 “이렇게 마른 사람도 살아 있는데…….”한 일이 있다. 아니, 혹시 저승길의 순번이 바뀌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혹시 내 살집이 조금이라도 더 좋았으면, 그 부인의 애통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마음이 뒤숭숭한 채로 집에 돌아와 “그래, 상가댁에는 잘 다녀 왔수?” 묻는 아내에게 대강의 말을 해 주고, 그래도 좀 위로의 말을 기대했는데, “싸지, 해다 주는 밥도 잘 안 먹고 속도 썩이더니, 나가서 그런 말이나 듣고…….”하는 것 아닌가?  언뜻 생각에도, 그 말 속에는 오랜 세월 쌓여온 원망이 녹아 있는 것이리라. 서운한 생각을 억누르고, “그래 모든 잘못은 내게 있지. 무슨 염치로 남 탓을 하랴?” 남편을 여읜 그 부인에게는 물론, 남편의 너그럽지 못한 식성으로 평생 속이 상해 온 집사람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사죄의 念을 禁치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저런 일이 가슴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으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어도 현재의 体重以上을 유지해 보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食慾이 動해서 먹는 게 아니라, 억지로 먹는 것도 보탬이 될까? 하면서도……. 생각대로 잘 될 것 같지는 않지만…….
多病所須唯藥物
다시 돌이켜 보게 된 六 ·二五
大統領의 言動
대화의 양념, 재치와 유머
登山과 山菜
사투리 단상
体 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