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이유에서

조두영
Reading & Writitng
말세이유에서 (1) : 꿈속의 말세이유 

                                          
  더블린을 출발해 파리공항 에어프랑스 전용청사(A2)에 내린 뒤 곧바로 같은 청사 지하층에서 올라탄 TGV는 불과 네 시간 만에 나를 말세이유(Marseille) 생샤르르에 내려놓았다. 드디어 왔구나.

  그전 같으면 파리시내로 나가 겨우 기차에 오를 시간인데. 참, 세월 좋아졌다! TGV도 좋아졌다! 20여 년 전에는 텅텅 비어 다녔지만, 이제는 2등 차에 이층 칸도 생겨 돈 걱정 덜 하고 탄 대학생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는 공항안내원들 마저 더러 “나, 영어 몰라요!”라고 뒷짐을 지었는데, 이제는 보안검색 직원까지 어떻게 내 출신을 먼저 알아보고 “어서 오십시오!”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해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참 좋아졌다.

  말세이유라는 단어는 초등학교시절부터 귀에 익은 말이었다. 세계 3대 미항(美港)으로 배워 시험문제로도 잘 나왔거니와 金來成의 [진주탑]을 읽은 뒤 다시 한 권으로 압축한 원작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아동문고로 읽어서 말세이유가 이 소설의 현장임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알센 르팡이 등장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의 하나로 [기암성(奇巖城)]이란 것이 있어, 여기서 르팡이 영국의 음흉한 탐정 샬록 홈스를 막판 양자대결에서 육혈포 한 방으로 날려버리는 장소가 말세이유 인근 암벽지대 바닷가였다. 어린 나에게 말세이유는 언젠가는 밟고 싶은 땅이었다. 꿈에서라도 가 보고 싶은 항구였다.

  말세이유라는 단어는 젊어서도 내 가슴을 뛰게 하였다. 그것은 고등학교에서 시작해 대학시절에 보았던 프랑스영화 때문이다. 어른들이 지나가는 말로 하던 것에서 ‘페페 르 모코(望鄕)’이라는 영화이야기를 들어 알다가 이를 종로구 운이동(雲尼洞)의 천도교 대강당이 ‘문화관’이라는 이름으로 개봉영화관이 된 곳에서 보았던 것에서 시작하였다. 개봉 아닌 비가 죽죽 내리는 묵은 필름이었다. 고3 막 올라갈 무렵이었다. 식민지 알제리의 도둑두목으로 나온 쟝 가방(Jean Gabin)이 그곳 카스바를 휘집고 다니는데,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본토에서 잠시 와 있는 처녀와 열애에 빠지고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그녀가 탄 말세이유행 여객선이 ‘뚜!’하는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고 있는 것을 보며 부두에서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살하는 이야기였다. 자기는 도둑이라 평생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면서, 문화와 고향의 상징인 ‘본토여자’를 떠나보내는 사나이의 심정이 아주 그럴 듯 하였다. 내가 특히 이 영화에서 속으로 충격받은 장면은 백인 젊은이로 꽉 찬 수영장 씬 이었다. 청소년 하나가 자기 또래 처녀에게 “씰비(Sylvie)야!”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풍덕 수영장에 뛰어 들어오는 장면에 공연히 가슴이 설레었다. 서양영화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전까지의 영화에는 수영복차림이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남녀가 벌거벗고 자연스럽게 희희덕거리는 것을 보니 내 눈과 가슴이 일시에 뒤집혔던 것이다.

  고3 졸업을 앞두고 문과반(文科班)에서 의과를 지망하니 어느 선배가 내게 왜 의사가 되려느냐고 물어 온 적이 있었다. 불쑥 나온 내 대답이  “선의(船醫)나 외인부대 군의관이 되려고요”여서 그도 놀라 뒤에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모로코’라는 영화는 의예과시절에 보았다. 원전인 게리쿠퍼와 마리네 데이드리히가 주연하는 해묵은 필름도 보았고, ‘외인부대’라는 이름으로 새로 찍은 것에서 게리쿠퍼가 다시 나와 훨씬 젊은 지나 로로브리지다와 공연하는 것도 보았다. 창녀인 지나가 단골고객 쿠퍼에게 정이 들어 그 애인이 속한 외인부대가 죽음을 찾아 사막 오지로 떠날 때 망설이던 그녀가 드디어 자기도 샌달을 벗어 모래 위로 던지고 부대 뒤를 쫓아가는 라스트 씬이 젊은 우리를 울컹거리게 만들었던 영화다(여담이지만 이 지나 로로브리지다를 좋아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의 유두연(劉斗演)감독이 어린 딸 별명을 지나(Gina)라고 붙었는데, 이 딸이 오늘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유지나 교수다). 그런데 이들 영화에서도 남녀주인공 모두가 꿈에 그리는 곳이 말세이유였다. 1930년대에 쓴 이효석(李孝石)의 수필에서 ‘현대인의 꿈, 그것은 언덕 중턱 어느 삼류호텔 독방에서 지폐로 가득 채운 트렁크를 침대 모서리에 세워 둔 채 창밖으로 펼쳐지는 항구와 지중해를 오가는 기선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내 머리에 박히게 된 것도 그 즈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의대 본과로 올라오자 프랑스영화는 주류가 낭만주의에서 깽 영화(film noir)로 바뀌었다. 장소는 변함없이 말세이유인데, 남자 주인공인 장 가방, 알랑 들롱, 장 뽈 벨몽도가 義理있는 암흑가 거물로 나오는가 하면 화니 아르당(Fanny Ardant) 같은 여배우가 애처러운 마담으로 나와 판을 잡았다. 이들은 백주대낮에 말세이유 중심지 화려한 고급가게들이 줄 서 있는 언덕길에서 밀수입한 금괴나 담배를 놓고 총을 쏘았고, 이차대전 후에 쌓았다는 그 유명한 말세이유 기차역으로 휘청 꾸부러져 올라가는 흰 대리석 층계와 석등도 자주 필름에 비치었다. 흰 대리석, 어딘지 영화 ‘망향’에 나오던 씰비를 연상케 하는 층계였다. 쥴 닷생(Jule Dassin)감독이 만든 영화가 그 중 심오한 철학에 번쩍인다고 한 이명원(李明遠)과 임영(林英)의 영화평을 당시 기고만장하던 한국일보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깽 두목이 총에 맞아 피를 줄 줄 흘리면서도 누구를 살리려고 직접 운전해 야반대로를 달리는 장면을 두고 한 말인 듯 하다. 인간들의 욕망과 양심이 뒤범벅이 된 채 프랑스와 지중해세계를 이끌어 가는 이 영화 속 말세이유의 뜨끈하고 끈끈한 분위기는 젊은 내 가슴을 꿈틀거리게 하였는가 보다.

  내게는 그런 말세이유였다.


말세이유에서 (2) : 에드몽 당테스를 찾아서 

  사실 말세이유 기차역 프랫트홈을 밟기는 지난 20여 년 간 이번이 대 여섯 번째다. 그러나 매번 기차를 다시 바꿔 타고 다음 기회를 벼르면서 떠났던 것이다. 하루쯤 묵을 시간도 있었건만 웬일인지 이 도시는 며칠 걸려 차근차근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냥 넘기기만 하였다. 어딘지 두려웠다. 이 기차역은 고지대 끝자락, 항구로 내리 꽂는 언덕 맨 꼭대기에 있어 프랫트홈에서는 바깥 도시의 건물이 보이지가 않아 궁금하고도 두려웠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나도 궁금하다. 아마도 과거 맹랑하던 젊은 시절이 회상되는 것이 싫거나 겁났던 것이 아니었을까?  

  겨울이라 일찍 어둑해진 거리를 택시는 달렸다. 그 유명한 역 앞의 긴 돌계단을 뒤로 하고 택시는 언덕 아래를 향하여 이리 기웃둥 저리 기웃둥 하며 달렸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길 가 건물은 모두가 희였다. 눈에 들어오는 것 마다 어딘지 낯이 익다. 옛 영화에서 수 없이 보았던 저 돌기둥과 분수, 저 우뚝 선 돌 사자상(獅子像), 우람한 야자수, 요렇게 뺑 돌아가다 보면 나오는 깽들이 습격하던 보석가계, 골목 귀퉁이의 삼류호텔과 부두가 보일 것이 틀림없는 저 삼층의 창문! “야, 야!” 소리가 속에서 절로 나왔다. 들 뜬 나는 젊은 운전수에게 “혹 장 가방과 알랭 들롱을 아시우?”하니, 모른단다. “그러면 장 뽈  벨몽도는 아시우?”라고 물었다. 단단한 체구에 걸쳐 입은 껌정 티샤쓰 위로 몽둥이를 닮은 털 성큼 난 팔뚝이 보인다. 안단다. “나도 델몽도(Delmondo)는 가끔 따서 먹어요”란다. 파인애플 깡통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구, 말이 안 통하는구먼. 하천(河川)은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데없구나.

  그렇지, 또 한군데가 그랬지. 갑자기 나는 동경 아사꾸사(淺草)의 골목 극장가(劇場街)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곳은 큰 절이 있는 시장 속을 뚫고 가다 나오는 골목인데, 도호(東寶) 직영체인 영화관을 비롯해 서너 개 극장이 사무라이영화(時代劇)를 비롯해 고금(古今)의 일본명화를 두어 편씩 바꿔가며 상영했었다. 나는 동경을 지날 적마다 자주 들렸고, 한번은 토요심야프로에 들어가 밤새고 나온 적도 있다. 80년대 까지  우에노(上野)에도 그런 극장가가 역 옆에 있었지만 손님이 줄어 먼저 없어지고, 이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 보면 관객은 거의 다 나처럼 혼자 온 점잖은 중상류 남자노인들이다. 그런데 지난여름에 들렀더니 딱 한군데가 문을 열고 있었다. 반가워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좀 있으니 관리인이 나와 민망해 하면서 “주말에만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세대와 문화가 완전히 변해 버린 것이다.

  말세이유서의 아침, 부리나케 부두로 나온 내게서 “애개개!”소리가 절로 나왔다. 상상보다 너무 작았다. 말세이유 관광의 출발점이요, 중심이라 하는 이 구항(舊港)은 관광용 작은 배 몇 척만 빼놓고는 욧트로 꽉 차있었다. 큰 돛대를 단 목선(木船)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철선 고깃배마저 한 척 없었다. 항구가 바로 욧트 정박장인 것이다. 휘둘러보아도 얼굴에 칼 자욱 나고 배 툭 튀어나온 바다의 사나이는 없었다. 부산 자갈치시장처럼 바글대는 생선시장도 없고, 저 유명한 브이야베스를 파는 좌판식당 하나 없었다. 아니, 여기 말세이유 맞나?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들어가 있었다고 나오는 디프이 있는 섬이라도 우선 가 볼까 했는데, ‘일기불순 오전휴항’이라는 안내문이 매표소에 붙어 있었다. 날씨는 비록 흐렸지만 배가 못 다닐 정도의 물결은 아닌 것 같았다. 속에서 “이 사람들, 너무 농땡이 치는 것 아니야!”라는 투덜거림이 나왔다. 해운대와 오륙도 왕복 유람선은 더 해도 떠나던데!

  항구 북안(北岸) 언덕이 중세(中世)지구였다. 건물 모두가 그때 지은 것이다. 부둣가 수백 년 묵은 이층 집 하나가 시청(市廳)이란다. 시장이 지금 집무중이라는 신호인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물론 현실의 시청은 저 멀리 어디에 현대식 고층건물을 쓰고 있을 것이다. 어슬렁 어슬렁 비탈길을 올라 본다. 그리고 속으로 “선창(船倉)가 파도 깊이 스며어~드느은데 ... 홍도(紅桃)야, 울지 마라 오빠가 이~있다...”를 뽑아댄다. 구멍가게도 있다. 할머니가 망태기에 긴 빵 하나와 포도주 작은 병 하나를 사들고 천천히 걸어간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골목길이 서로 연결이 잘 되어 있다. 옛 자선병원도 있고, 고개를 넘으니 학교와 대성당이 나온다. 해안가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은 이 대성당은 지금 수리중이다. 이 고개 너머 해안에는 아주 큰 신항(新港)이 숨어 있었다. 코르시카 섬을 왕복하는 훼리가 거기에 정박하고 있었다. 이 중세지구는 맨 노인들만 사는 동네였다. 그것도 거의 다 혼자 사는 노인들인 모양이다. 연금이나 복지기금을 받는 노인, 다리 저는 노인, 뚱뚱한 여인, 도수 짙은 안경을 쓴 노인, 반 치매인 노인들이 빵집 겸 구멍가게 카페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서로 말도 않고 그저 바깥만 내다보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건물도, 사람도 너무 낡았기에 안쓰러운 정도를 넘어 보기가 싫었다. 저리 되면 어쩌나...!

  점심시간이 되어 건너편 부두 귀퉁이에 중국음식점 간판이 둘 크게 붙어 있어 그리로 갔다. 그런데 둘 다 휴업이란다. 관광객 많은 여름 한때만 한다고 한다. 고급스러운 간판인 것을 보면 사철 다 했을 상 싶은데, 결국은 이 도시가 쇠퇴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후에도 연안관광선은 뜨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발길이 자연 구항의 남안(南岸) 언덕을 향했다. 18~19세기에 전성했던 곳이라, 바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원작무대가 되는 곳이다. 이 쪽은 길도 널찍하고, 오렌지 색조의 건물들은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저쯤이 소설 속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의 주인집 모렐(Morrel)商社가 있음직했던 거리요, 저것이 바로 에드몽 당테스가 아버지와 살았던 5층 건물인 것도 같았다. 바다 쪽 부두가 끝나는 곳이 바로 두 젊은 남녀가 산책을 했다는 생니꼬라 요새요, 그 아래에 까따랑거리(Rue de Catalans)라는 팻말이 나왔다. 야, 여기가 에드몽의 약혼녀 메르세데스가 살았던 스페인계 까달로니아 마을이 아니었던가. 에드몽이 억울하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는 검찰청도 있었다. 그저 에드몽 당테스라는 2백 년 전의 유령인물을 찾아 나는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고 기웃거렸다.

  한 골목을 돌자니 사람들이 웅기종기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연방 “아땅시옹, 아땅시옹(Attention)!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나왔다. 이 무슨 “차려!” 소리인가. 그런 소리는 내 상상에서는 드골 대통령이 군중 앞에 나올 때라든가, 아니면 영화에서 검사(劍士) 스칼라무쉬가 귀족원 대표들을 향해 한판 붙자고 소리칠 때나 나오는 엄숙한 말인데, 이 무슨 변고인가. 가까이 가보니 야채장사 하나가 “자, 오세요, 떨이요, 떨이!”라는, 손님 끌어 모으는 소리였다. 아니, 저런 고상한 말을 시장바닥 구루마장사가 쓰다니,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한다. 독일어의 “아후퉁!”하면 포로수용소 잠자리 순찰 나치병정이나 하는 불호령으로 내 귀에는 각인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할까.    

  남안 언덕 위에 올라보니 그 남쪽에 더 높은 산이 있고, 그 산 정상에 솟아있는 거대한 수호성모대성당(守護聖母大聖堂, Notre-Dame de la Garde)이 들어왔다. 아, 그렇지, 저 성당 망대(望臺)에서 사람들이 항해 중 죽은 선장을 대신해 일등조타수 에드몽이 몰고 돌아오는 무역선 파라옹를 바라보는 장면이 소설 첫대목에 나오는, 그 성당이로구나. 그렇다면 올라가 보아야지!
  성당은 3층으로 되어있었고, 전망대는 2층을 밖으로 삥 둘러 있었다. 과연 말세이유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 당시에는 아마도 이 도시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을 정도로, 성당은 엄숙장엄하고 아주 컸다. 하나, 험이 있다면 지하 남자 화장실에 물이 나오지 않아 막상 성당 속에 들어갈 때 손가락을 출입구 성수(聖水)에 담글 수가 없었던 것이라 할까. 성당 속에 있는 그림들 가운데 각기 다른 인종과 민족이 자기 식으로 성모성자를 그린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중국그림에는 중국 옷 입은 여자가, 일본그림에는 일본 옷 입은 여자가 정원에서 각기 아이 하나를 끼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월남그림은 있는데, 한국그림은 없었다.

말세이유에서 (3) : 맨 눈으로 본 말세이유 

  말세이유의 도심(都心)을 걸어보기로 했다. 구항 동안(東岸) 언덕이 부채꼴로 활짝 퍼져 기차역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는 지형이고, 그곳에 시 중심이 있다. 중심대로 좌우로 백화점, 은행, 박물관, 영화에서 보던 일류상점자리 주요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데, 대낮에 보니 흰 석조건물이 먼지가 오래 끼어 해골바가지 같은 징그러운 회색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시내중심가가 모두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가난한 백인들이 눈에 띄긴 했다. 자세히 보니 고급가게는 없고 맨 싸구려만 파는 곳이다. 시장골목에 들어갔더니 수건을 둘러 쓴 뚱뚱한 무슬림(Muslim) 여인들, 그리고 “밀수담배 싸게 사지 않을래요?”라고 다가오는 중동남자들로 득실거렸다. 이들은 덩치도 나보다 훨씬 컸기에 혼자 어슬렁거리기에는 다소 신경이 쓰였다. 모든 가게가 다 무슬림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집이다. 엿을 잔뜩 바른 과자는 참 먹음 직 했다. 옛날 동화 속 도둑 알리바바나 아라비아공주가 먹던 과자 생각을 하니 긴장의 와중에도 침이 괴었다.

  내친김이니 골목을 피하고 대로를 따라 천천히 기차역까지 걸어 올라가 보았다. 밤에 보던 거리가 아니었다. 도착하던 날 밤에는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다 숨어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초겨울 날씨라 추위에 약한 이들이 아마 밤이라서 꼼짝 못하고 집 속에 들어앉아 있었구나 하는 추측도 해 보았다. 여기저기 묵고 싶었던 삼류호텔들이 서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으스스하고 검다. 아, 잘 묵지 않았구나. 어쩐지 드골공항 TGV역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 이상하기는 했다. 나는 ‘삼류호텔’이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저 “기차역 아래언덕배기 중간치 호텔을 잡아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 담당직원은 난감한 듯 한참 어물거리다가 “근처에는 마땅한 곳이 없어요. 역에서 10 여 분 걸리는 곳도 괜찮지요?”라 해서 좋다고 했었다. 그러나 내 숙소는 택시로 대로(大路)를 쏜살같이 십여 분 달려서야 나왔기에 나는 의아하게 생각해오던 터였다. 걸어서 십여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세이유 시내는 연금을 받고 홀로 사는 노인네들이나 가난뱅이 백인들이 좀 있고 나머지는 전부 말똥냄새 나는 ‘검정다리(Pied-noir)'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형편이었다. 중상류 백인들은 여기서 빠져나와 남쪽에 새 마을을 짓고 사는데, 내 호텔이 있는 본네베잉(Bonnevein) 마을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곳은 미국 같았다. 호텔 옆 쇼핑몰에는 고급가게도 여기저기 있고, 맥도날드집도 있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서 호텔선정에 대한 내 오해가 풀렸다.

  때마침 터키의 EU 가입 문제를 놓고 신문마다 야단이었다. 임기가 만료되는 EU의회 의장인 네덜란드 출신 훠크스타인(Vorkstein)이 사임사 겸 한마디가 “터키가입 절대반대!”다. 그는 암스텔담의 신생아 출생신고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모하메드라면서, 시락 프랑스대통령이나 슈뢰더 독일수상은 선거를 의식해 대놓고 말은 못해 내가 한다면서 ‘유럽문화 보존’을 강조하고 있었다. 프랑스 인구 5천만 명 가운데 무슬림이 5백만 명이라 한다. 십여 년 전 내가 본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 공원 풀밭은 공휴일이면 터키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완전점령하고 고기 구워먹고 놀고 있었다. 덴마크 우익단체 하나가 코펜하겐 시내 곳곳에 붙인 포스터에는 금발소녀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이 여자아이가 연금을 타게 될 때 그 돈을 내는 사람의 2/3 가 무슬림입니다!’라는 글이 써 있다는 기사도 보였다. 터키를 통해 아랍인들이 무한정 들어올 것을 심히 두려워함이 역력하였다. 미국인도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도 나왔다. 지금 미국에서는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중국인과 인도인 청년들이 미국인과 치열한 취직경쟁을 벌리는데, 별 볼 일이 없는 직종이라면 그냥 봐주겠으나 수학, 과학 같은 장래를 지배할 직종에서 그러하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국민들이 높은 세금을 내는 까닭에 무료에 가까운 등록금을 내면서 다닐 수 있는 대학에서 인권옹호와 같은 좋은 교육을 받는 제도를 힘들게 만들어 놓았더니 그만 그 열매를 비백인(非白人)이 거침없이 들어와 따먹고 눌러 앉아 “나, 평등!”하면서 조만간 주인행세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사가 연일 나오고 있었다.

  디프섬과 연안암벽지대를 도는 관광선은 연 이틀 휴항중이다. “그래, 관광은 여름이어야지!”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호텔 8층 방의 창밖을 내다보니 바로 정면으로 디프섬이 보이는 것이었다. 어, 이것 보게. 도 보이는데, 두어 채 건물뿐이다. 섬도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시체를 던졌다는 바위 높이도 그리 높지가 않았다. 그 섬에 지하감옥이 있어 보았자  깊을 수 있은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루 더 묵으며 배가 출항할 날씨를 기다리자는 마음이 슬그머니 식어갔다. 옆에 보이는 앞산은 바로 말세이유 항구 입구에 있는 암벽의 뒤가 되었다. 거, 호텔 안내 한번 잘 받았다고 나는 벙긋거린다.
 

말세이유에서 (4) : 맨 눈으로 본 말세이유 

  말세이유의 도심(都心)을 걸어보기로 했다. 구항 동안(東岸) 언덕이 부채꼴로 활짝 퍼져 기차역을 향해 서서히 올라가는 지형이고, 그곳에 시 중심이 있다. 중심대로 좌우로 백화점, 은행, 박물관, 영화에서 보던 일류상점자리 주요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데, 대낮에 보니 흰 석조건물이 먼지가 오래 끼어 해골바가지 같은 징그러운 회색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시내중심가가 모두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로 꽉 차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가난한 백인들이 눈에 띄긴 했다. 자세히 보니 고급가게는 없고 맨 싸구려만 파는 곳이다. 시장골목에 들어갔더니 수건을 둘러 쓴 뚱뚱한 무슬림(Muslim) 여인들, 그리고 “밀수담배 싸게 사지 않을래요?”라고 다가오는 중동남자들로 득실거렸다. 이들은 덩치도 나보다 훨씬 컸기에 혼자 어슬렁거리기에는 다소 신경이 쓰였다. 모든 가게가 다 무슬림 음식이나 물건을 파는 집이다. 엿을 잔뜩 바른 과자는 참 먹음 직 했다. 옛날 동화 속 도둑 알리바바나 아라비아공주가 먹던 과자 생각을 하니 긴장의 와중에도 침이 괴었다.

  내친김이니 골목을 피하고 대로를 따라 천천히 기차역까지 걸어 올라가 보았다. 밤에 보던 거리가 아니었다. 도착하던 날 밤에는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다 숨어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초겨울 날씨라 추위에 약한 이들이 아마 밤이라서 꼼짝 못하고 집 속에 들어앉아 있었구나 하는 추측도 해 보았다. 여기저기 묵고 싶었던 삼류호텔들이 서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니 으스스하고 검다. 아, 잘 묵지 않았구나. 어쩐지 드골공항 TGV역에서 호텔을 예약할 때 이상하기는 했다. 나는 ‘삼류호텔’이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저 “기차역 아래언덕배기 중간치 호텔을 잡아주세요”라고 부탁했는데, 담당직원은 난감한 듯 한참 어물거리다가 “근처에는 마땅한 곳이 없어요. 역에서 10 여 분 걸리는 곳도 괜찮지요?”라 해서 좋다고 했었다. 그러나 내 숙소는 택시로 대로(大路)를 쏜살같이 십여 분 달려서야 나왔기에 나는 의아하게 생각해오던 터였다. 걸어서 십여 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세이유 시내는 연금을 받고 홀로 사는 노인네들이나 가난뱅이 백인들이 좀 있고 나머지는 전부 말똥냄새 나는 ‘검정다리(Pied-noir)'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형편이었다. 중상류 백인들은 여기서 빠져나와 남쪽에 새 마을을 짓고 사는데, 내 호텔이 있는 본네베잉(Bonnevein) 마을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곳은 미국 같았다. 호텔 옆 쇼핑몰에는 고급가게도 여기저기 있고, 맥도날드집도 있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서 호텔선정에 대한 내 오해가 풀렸다.

  때마침 터키의 EU 가입 문제를 놓고 신문마다 야단이었다. 임기가 만료되는 EU의회 의장인 네덜란드 출신 훠크스타인(Vorkstein)이 사임사 겸 한마디가 “터키가입 절대반대!”다. 그는 암스텔담의 신생아 출생신고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모하메드라면서, 시락 프랑스대통령이나 슈뢰더 독일수상은 선거를 의식해 대놓고 말은 못해 내가 한다면서 ‘유럽문화 보존’을 강조하고 있었다. 프랑스 인구 5천만 명 가운데 무슬림이 5백만 명이라 한다. 십여 년 전 내가 본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 공원 풀밭은 공휴일이면 터키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완전점령하고 고기 구워먹고 놀고 있었다. 덴마크 우익단체 하나가 코펜하겐 시내 곳곳에 붙인 포스터에는 금발소녀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이 여자아이가 연금을 타게 될 때 그 돈을 내는 사람의 2/3 가 무슬림입니다!’라는 글이 써 있다는 기사도 보였다. 터키를 통해 아랍인들이 무한정 들어올 것을 심히 두려워함이 역력하였다. 미국인도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도 나왔다. 지금 미국에서는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한 중국인과 인도인 청년들이 미국인과 치열한 취직경쟁을 벌리는데, 별 볼 일이 없는 직종이라면 그냥 봐주겠으나 수학, 과학 같은 장래를 지배할 직종에서 그러하니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이다. 국민들이 높은 세금을 내는 까닭에 무료에 가까운 등록금을 내면서 다닐 수 있는 대학에서 인권옹호와 같은 좋은 교육을 받는 제도를 힘들게 만들어 놓았더니 그만 그 열매를 비백인(非白人)이 거침없이 들어와 따먹고 눌러 앉아 “나, 평등!”하면서 조만간 주인행세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기사가 연일 나오고 있었다.

  디프섬과 연안암벽지대를 도는 관광선은 연 이틀 휴항중이다. “그래, 관광은 여름이어야지!”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그리고 호텔 8층 방의 창밖을 내다보니 바로 정면으로 디프섬이 보이는 것이었다. 어, 이것 보게. 도 보이는데, 두어 채 건물뿐이다. 섬도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시체를 던졌다는 바위 높이도 그리 높지가 않았다. 그 섬에 지하감옥이 있어 보았자  깊을 수 있은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루 더 묵으며 배가 출항할 날씨를 기다리자는 마음이 슬그머니 식어갔다. 옆에 보이는 앞산은 바로 말세이유 항구 입구에 있는 암벽의 뒤가 되었다. 거, 호텔 안내 한번 잘 받았다고 나는 벙긋거린다.


말세이유에서 (5) : 연안절벽마루에서 마주친 쌩떽쥐뻬리 

                 
  호텔 앞산을 올라가 보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누런 산을 석회암 잔 조각이 깔린 외길을 따라 올라가는 이 등산은 꼭 누워있는 누렁퉁이 진도개 꼬리를 타고 올라가 등뼈 위를 걷는 것에 흡사한 기분이다. 해발 4백 여 메타라는 산등으로 올라가니 그 아래는 바다로 떨어지는 수직 절벽으로, 바다 쪽에서 보면 길게 펼쳐지는 회색 암벽지대의 위가 되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사람 하나 없다. 야, 나는 바로 [기암성(奇巖城)]에 나오는 괴도(怪盜) 알센 르팡이 그리 하였듯이 갑자기 몸이 가벼워져 이리저리 휙휙 뛰어다녀도 본다.

  멀리 뻗은 지중해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엉뚱하게도 내 머리 속에는 저기 저 바다에 빠져 죽은 안톤 드 쌩떽쥐뻬리(Anton de Saint-Exupery)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야간비행]과 [어린 왕자]를 쓴 작가 겸 비행사였던 그가 1944년 7월 망명정부 자유프랑스군 소속 정찰비행임무를 띠고 코르시카 미군 공군기지에서 단독출격하여 行方不明되었는데, 금년이 바로 그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비행기가 독일 전투기나 대공포 포화에 맞았거나 기계고장으로 추락했을 것이라 하여 쌩떽쥐뻬리는 대독항쟁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영웅대접을 받아 왔다. 그러던 중  1990년 중반에 들어와 말세이유의 어느 잠수부가 근해 해저에서 이 영웅이 타고 나갔던 비행기와 흡사한 비행기 한 대가 온전한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일이 있었고, 다시 몇 년 뒤에는 말세이유의 어느 어부가 같은 해역에서 그믈에 걸려 올라온 물건 가운데서 이 영웅부부의 이름이 삭여진 금팔찌를 발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발견해역은 기록으로 보아 쌩떽쥐뻬리가 작전비행을 지시받은 지역에서 수 백 킬로가 되며, 이것이 사실인 진대 그는 명령이탈을 한 격이 되어 그 최후가 명예로운 전사로 인정을 받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정부도, 그의 유족도 그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 뛰었고, 흑심을 품은 어부가 가짜 금팔찌를 만들어 이름까지 새겨 넣었을 것이라는 의심까지도 받았다.

  금년 4월, 프랑스정부는 드디어 말세이유 근해에서 옛날 쌩떽쥐뻬리가 타고 나갔던 비행기 잔해를 건져 올렸다는 것을 공식발표하였다. 그래서 이 영웅의 죽음이 자살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말세이유 앞바다는 당시 독일 전투기가 뜨지를 않았다 한다. 그 후의 조사는 더 나아가, 그가 북아프리카에서 대독항쟁을 할 때부터 이미 향수병에 시달렸고, 마지막 출격 즈음해서는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 특히 출격 전날 해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만난 낯선 여자에게 “우리 같이 수영하지 않을래요? 내일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니까 그래요”라고 말을 걸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전 얼마동안 드골에게 속에서 페탱 정부를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의심을 받아 드골이 직접 내린 비행 금지령으로 한동안 날지를 못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러나 프랑스정부 차원의 성명내용은 단지 발견사실만 이었다.

  프랑스 국내에서 일어났던 이차대전과 그 수복 직후 사태에 관해 쓴 두 권의 책이 다시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 둘은 어떻게 보면 정반대 관점을 소개한 책이었다. 묘하게도 같은 달인 금년 8월에 출판된 책들인데, 일간신문 주말 서평에서 크게 소개되었었다. 며칠 먼저 나온 책이 박지현 저 [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 비시 프랑스와 민족혁명]으로, 저자는 35세 여성이다. 저자는 이화대학 사학과, 서강대학 대학원 서양사, 프랑스 파리 제1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논문을 이차대전 중의 프랑스 비시정권 연구로 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 책은 박사논문을 일반서적으로 고쳐 쓴 것이었다. 요컨대 비시정권은 욕을 먹어 싸지만 그렇게만 매도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주요골자다. 이차대전 직전의 프랑스는 좌우대립이 극심하다가 마침내 인민전선 좌파정부가 들어서는 계기로 오늘 날 우리가 겪는 자체 내 ‘南南갈등’처럼 ‘佛佛갈등’이 심해져 무엇이건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 프랑스 패전 직전에야 좌파정권이 물러났으나 이미 늦었다는 것, 비시정권은 프랑스 상하원 의원이 거의 전원 그대로 모여 만장일치로 가결해 만든 합법적 정부였다는 것, 비시정권에는 기회주의적이거나 영웅주의적 행동가가 없었다는 것, 프랑스는 독일의 식민지로서가 아닌 협력국이 되어 원래 가졌던 식민지와 군대를 고스란히 유지하였다는 것, 민족혁명이 일어나 교육과 복지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 정신문명의 새 전기가 마련되는 중이었다는 것이 그 주요내용이다. 프랑스는 이제 EU체제가 들어서 독일과 더부러 이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화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이 논문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중앙일보 프랑스 특파원을 오래 한 60대 후반인 주섭일 저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이다. 저자는 귀국을 미루고 파리 제13대학에서 늦게 공부해 정치학박사가 되었다. 이 방대한 책은 어떻게 드골이 파리 수복 후에 언론인, 지식인, 정치인, 기업가, 학자, 연예인, 출판인 가운데서 대독협력자들을 어떻게 솎아내고, 어떻게 처단하였는가를 자세하게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우리의 친일청산작업의 방법론으로도 적극 추천하고 있으며, 한겨레신문사 ‘청산작업’ 특별강좌로 많은 젊은이들을 교육시켰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읽어보니 수복이전에 있었던 드골과 지로(Giraux)장군의 대표역할 경쟁 자초지종, 지하저항신문 ‘콩바(Combat)' 주필이었던 카뮈가 수복 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나치협력자 대숙청을 외치며 드골을 재촉하였던 사실, 그리고 관용을 외치는 모리악과 처단을 요구하는 카뮈와의 논쟁내용이 실려 있었다.

  두 권 다 관심을 가진 동문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절벽마루에서 “어구구, 어구구!” 뒤뚱거리며 내려왔다. 나이가 드니 오르기보다 내려오기가 더 벅차다. 허긴, 우리 대통령들도 그랬을 터이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