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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유람기 -심영보
中國 山東半島 遊覽 [石島(赤山),泰山,曲阜(孔廟.孔府.孔林)]  ['07.7.30 ~ 8.4.]       
신라의 崔致遠나라에 유학가서 文科 급제하고 文名을 떨쳤다면, 또 다른 신라인 張保皐나라에 유학가서 武科 급제하고 武名을 떨쳤고 그로 연유하여 이후 신라로 돌아와서 淸海鎭 大使가 되고 韓*中*日(羅*唐*倭) 무역을 아우르는 海上王 칭호 까지 얻었던바, 그가 赤山浦(지금의 榮成石島鎭) 에 新羅坊을 설치하고 또 그들을 위하여 [赤山法華院](사원)을 건립(AD 824) 하였던 사실이 근래에 고증으로 확인되면서, 이 그림의 [장보고 전기관] 등을 지어 많은 한국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장보고전기관] 안쪽 마당에 세워진 [張保皐 장군상]. 근래에 발견된 日僧 [圓仁][大唐求道巡禮記(대당구도순례기)]와 한국에서 제공한 [해상왕 장보고] 관련 자료를 근거로 해서 건립(2005년)되었다고 한다. 圓仁은 그가 [적산법화원] 대사찰(大寺刹)에 머무는 동안 겪은 일과 장보고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그의 기록에 적어 놓았다 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 시조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터이다. 과연 이 시조의 격려(?) 때문일까? 泰山을 오르는 길은 무언가 각자의 최고 목표점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는 [의욕 넘친] 사람들로 북적였다.

泰山의 정상(해발 1545 m)인 玉皇頂(옥황정) 에는 玉皇殿(옥황전)이 있다. 여기에서는 중국의 역대 황제가 옥황상제(하늘의 최고 神 ?)에게 封禪(봉선)의식(등극 신고식)에 이은 제사를 지냈다 한다. 이 입구에는 [秦始王(진시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無字碑(무자비)]가 있는데, 주위 경치가 하도 아름다워 감히 말로 표현 할수 없어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의 五嶽(오악)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東嶽(동악) 즉 泰山은 이미 나라때 부터도 국민에게 친숙했던 산이었다는 표시가 등산 길 곳곳에서 보이던데, 이 그림은 나라 때 泰安府 宗室(태안부 종실, 지금의 군수 라고?) 이 세운 표석으로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 우리 가이드는 여기서 사진을 찍어야 진짜 태산에 다녀왔음을 증명한다고 우겨서 한장 또 찍었다.

至聖廟 (지성묘)]는 공자의 출생지이며 고향인 [曲阜(곡부)]에 있는 공자를 제사 지내는 祠堂(사당)으로 이 그림은 이 지성묘 입구의 문이다. 지난 2500년 동안 孔子(공자)와 儒敎(유교)의 본거지로 존재해 온 [곡부]는 주위의 어느 도시 보다도 孤潔(고결)하고 조용하며 또 어쩌면 침체하기 까지 한 느낌이었으니, 왜 여기서 조선시대 南山의 선비들이 맹물 마시고도 이 쑤신다던 분위기가 떠올랐는지?

孔廟(공묘,공자묘,지성묘)의 본당 건물 [大成殿(대성전)]이다. 이 건물 안에는, 孔子[공자,至聖]의 소상(塑像)과 그 좌우에 曾子[증자, 宗聖], 孟子[맹자,亞聖], 顔子[안자], 思子[사자] 등 사성(四聖)과 십이철(十二哲)을 배위하였다. 이 [대성전]은 중국의 3대 궁궐양식 건물의 하나로 꼽히는데, 나머지 둘은 北京의 [자금성(紫禁城)]과 泰安의 [대묘(岱廟, 황제가 봉선의식 즉 등극 신고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大成至聖文宣王墓(대성지성문선왕묘)]는 孔子의 묘비명이다. 공자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2500년 동안 꾸준히 추앙 받았고, 唐 宋 明 淸을 거치는 동안 많은 추존칭호를 얻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3가지로만 묘비명을 만든 것 같다. 넓은 [孔林(공림,孔氏의 가족묘지)]의 한쪽에 자리한 [至聖墓(지성묘), 공자의 묘]는 옆에 아들[리(잉어리,)]의 묘와 앞자락에 손자[子思(자사)]의 묘를 안듯이 품고 있는데 어느 묘도 벌초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아무도 감히 무덤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란다. 묘의 좌측 앞에는 [자공려(子貢廬)]를 복원한 작은 초막건물이 있어 공자의 사후에 제자 자공(子貢)이 6년간 시묘(侍墓)했던 효심을 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