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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용어가 영어단어로 바뀌는 시대에

공부한 학생시절의 낭만




  벌써 50년도 넘는 시절의 학생시절에 경험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자다가도 혼자서 픽 하고 혼자 웃는 일들이 있다. 바로 영어와 독일어가 함께 섞이고 우리말 의학용어조차 제대로 쓰이지 않던 시절, 그리고 한 교수의 강의로 모든 것을 익혀야 하는 시기에 내가 곤욕을 치렀던 일 하나를 떠올린다.

  당시 우리를 가르치셨던 교수들은 학생시절에는 독일어로 공부하다가 해방을 맞아 영어가 의학용어를 대치하는 시대를 함께 사시던 분들이셨으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분위기만이라도 상상해보라. 시험 시기가 되어 시간을 아낀다는 핑계로 책을 읽는 대신 노트에 매달려 보았지만 어떤 교수의 강의록은 독일어  투성인가 하면, 또 다른 교수의 것은 친절하게 영어. 독일어를 함께 써주신 경우, 아니면 어원을 깊어주시기 위하여 라틴어까지 섞어 주신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다. 1950년대만 초기만 해도 의학교과서란 워낙 귀한데다가 국내 출판물은 거의 볼 수 없어서 이른바 <가리방 원고>가 이를 대신하였고, 외국 교과서 구하기조차 힘들 때여서 교수의 말 한마디가 중요한 지식의 재원(resources)이었고, 시험을 준비할 때면 두 가지 모두를 외워야 했던 일이 아늑하게 스쳐간다.

  이런 과정에서 배운 의학용어인지라 요절복통할 에피소드도 적지 않게 많았다.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버릇이 되어 미국에서 귀국한 학자들한테서 지적당한 것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예컨대 위염을 stomachitis로 가르침을 주신 외과계 교수가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 수술은 한국 최고이나 알아들을 놈을 그대로 알아두라는 조교들의 협박 속에서 모른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영어 철자법에 신경을 쓰지 않는 후배들이 staff를 staffs로, subspecialty를 subspeciality, gallbladder를 gall bladder로, mesenchyma를 mesenchyme으로 가르쳐 주신 그 은덕(?)으로 그대로 후배한테 전수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이었다. 그중에서도 모 기초의학계 교수가 미국에서 갓 돌아 오시자마자 강의해주신 내용은 당시 필자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을 혼돈케 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껏 잊지 못한 것은 바로 기네아 돼지(guinea pig) 사건이었다. 강의 도중에 기니픽을 우리말로 옮기신다면서 ‘기네아 돼지’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당시 많은 동료들은 기니픽이 ‘돼지만큼 생긴 큰 짐승’인줄로만 알았고, 착한 동료학생들은 이를 모른체 이를 애교로 받아드렸지만, 어느 외과 교수가 위염을 stomachitis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를 참지 못하였고, ‘혹시 gastritis가 아닙니까’라고 점잖게 질문 아닌 아유를 던지기도 한 짓 꾸진 친구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시의 모 내과학 교수는 구내염(stomatitis)을 stomachitis라는 신조어로 대신하셨던 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K산부인과학 교수의 강의 중에 자세한 병리학 이야기를 해주셔 졸업 후 병리학 조교를 한 나에게 미리 큰 도움을 주시는 은혜(?)도 베푸셨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그 교수님의 ‘My Cop van Gieson" 이야기였다. 교수께서는 자궁 근종(leiomyoma) 강의 중에 ‘의학은 하나이지요. 산부인과학이건 병리학이건 졸업하면 함께 익혀야 할 것들(즉 ‘의학은 하나이다’)이니, 구분하지 말고 익혀두는 것이 좋겠지‘ 하고 <van Gieson> 염색법을 가르쳐주셨던 흔적이 노트에 남아 있다. H-E 염색표본으로는 평활근세포 기원인지 섬유세포 기원인지 구분하기 힘들지만 이 염색만으로 구별이 가능하다고 Novak 책에도 없는 내용을 가르치셨으며, 특히 염색결과가 어떻게 다른지 헛갈리지 않도록 'Muscle은 yellow이고, collagen은 pink인 van Gieson 염색"이라는 뜻이라고 일러주셨다. 당시 멋모르고 외웠던 이 말을 풀어보면 ’내 경찰관(cop)은 van Gieson‘이라는 뜻이니 그대로 외워 둔다면 나중에 크게 쓰일 것이라고 일러주셨던 일이 생각난다. 사실 나는 이 덕을 단단히 보았다. 풍문으로는 K 교수가 재미 수학 중 산부인과 병리학에 심취하여 우리나라에 세포병리학을 처음 도입하셨고, 또 이 염색법을 이용하여 논문을 쓰셨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를 열심히 외웠던 생각이 난다. 병리학에서 쓰는 염색법 이름과 염색 결과를 묶어서 쉽게 외우는 방법이라고 하시면서 가르침을 주셨으니 졸업 후 병리학을 공부한 필자에게는 여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학생시절의 우리들에게는 그저 시험치기 지식일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각종 연구는 지금처럼 분업되어 있지 않고 모든 연구기법을 스스로 익혀서 직접 하는 시기여서 그 교수에게는 이 van Gieson법은 미국에서 공부한 K교수님에게는 매우 신기하게 들렸던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일어인지 영어인지도 모르고 배움을 주셨던 교수들은 아예 발음일랑 개의치 않고 정성 하나로 우리를 가르치셨던 때의 일이다.



2008년 2월 24일

서울에서 김용일 보냄


분망하게 만들었던 학생시절의 ‘호연지기’


  의예과시절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름방학을 보냈다. 「큰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의예과시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지 않고는 언제나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졸자 의사가 된다」고 명의 길을 일러준 김명수 교수 (시사 영어 담당 시간강사)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의과대학 의사학 교수이었던 이영택교수가 담당하였던 불어 시간에 들려준 자신을 달래는 길을 찾을 것을 당부하셨던 때문인지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별아별 친구들이 다양한 방학기간을 보냈던 것은 틀림없다. 오국상(吳國相)군은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졌고 2학기 개강한 지 한 보름 지난 후에 강의실에 모습을 보였다. 강원도 설악산에 어느 절에서 수양(?)을 하고 왔다고 하고, 심영보 김홍덕, 박승균 군 등 대 여섯이서 팀을 만들어 열흘 넘어 자전거로 남해안을 돌아오는가 하면, 일부 친구는 명동에 있는 <돌채> 다방패(커피 한잔을 주문하고는 하루 종일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친구들)은 눈감고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않기라도 하듯 사색하며 피서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동석군(출석번호 22번)은 일생의 의료의 반주자로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서 여름 땀을 닦았다.
  몰론 그중에는 가정교사로 수업료를 마련하는 <부지런 파>도 있긴 해지만 대부분 호연지기를 키운다는 명분으로 무의촌 봉사, 농촌 손 거들기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본과 1학년에 배울 영문판 교과서를 주문하기 위하여 신요철 대표는 동분서주하였다가 결국 돈을 떼이게 되는 상황에까지 몰려 ‘내가 집접 사장 (오 사장이라고 기억된다)을 만났다’고 학년회의에서 신상발언하는 통에 우리는 신군에게 ‘직접’라는 별명을 만들어 주기도 했었다. 결국 박승균 대표가 가세하여 상당수의 책(일부는 책값)은 받았으나 일부는 받지 못하는 사기에 휘말려 학급 동료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아마도 그 때문에 체중은 몇 kg 감소하였으리라.
  나는 대구에서 올라온 촌놈이어서 미술, 음악 이야기만 나오면 서울 출신 동료들의 이야기에 기가 죽어 한 학기마다 2년 동안 하숙집 room mate를 바꾸어 교양 부족을 만회하려고 하였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미련을 남기고 끝났다. 그러나 이 덕택에 영어 소설도 제법 읽고, 서투른 불어공부도 하였지만, 음성 출신 권순홍 군은 나를 학생회관으로 끌고 가서 개인 바둑 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 괴짜 동기들은 의예과 2학년 학년말 시험을 치르고 부산으로 귀향하는 김광우군을 환송한다는 명분으로 동기생 12명이 안국동 막걸리 집에서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마시다가 통행금지시간 5분 전에 우는 예비 싸일렌 소리를 듣고서야 경기중학 부근에 있던 이재두군 집으로 도망치듯 가다가 결국 경기중학 정문에서 경찰관에게 붙잡혀 스리 쿼터 짐 수송차에 태워 종로 경찰서로 강제 송환된 뒤 하루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다행이도 경찰관의 배려로 서울의대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대우를 해주어 우리는 좀 도둑 취조하는 구경을 난로 가에서 보는 대우를 받았지만, 동짓날 밤이 이처럼 긴지를 경험하고 새벽 4시쯤 풀려나 오원환 군집(당주동)이 있던 청진동 설렁탕 집으로 가서 해장국을 먹은 사건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죽은 김광우 군은 제대로 밤기차를 탔다고 의기양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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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의예과를 끝내고 길 건너 의과대학으로 건너 왔을 때(1957년 4월) 학교 분위기는 정말 썰렁했다. 다만 간호학과로 넘어가는 함춘 동산 소나무 그늘 밑에서 오수를 즐기며 멀리서 들리오는 ‘아이스. 케-기’ 파는 소년의 소리, 간혹 창경원에서 날아드는 꿩 나는 소리를 듣던 생각이 날 대는 정말 낭만이 따로 없다고 들 했다(물론 지금은 그 동산이 없어졌다). 특히 나에게는 본과 2학년 시절은 시련이 모려든 시기이도 했다. 1년 선배 (본과 2학년)한테 등굣길에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학생 강실(2학년 강의실에 있었음)로 끌려가 나를 쌀가마니로 뒤집어 씨우고는 여럿이서 발길질 당하(일본말로 후구로 다다끼)는 등 린치 사건이 매일 한 두건이 터지곤 했다 (그 후 25년이 지나 그 선배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대 15회 졸업생은 학생 때부터 유난스럽다고 후배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의협심이 유난스러워 돌출적인 행동으로 주변의 교수들이나 선후배들의 주목을 받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본과 1학년 시절에는 전 학급 학생이 뜻을 모아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 세우기, 본과 2학년 시절에는 쿼터시험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학생들을 대강당에 몰아넣고 한 줄은 1학년 옆줄은 2학년 (나중에는 3학년)을 번갈 앉치고 부정행위를 방지한다는 대학에 대한 무언의 저항으로 학생과장실에 끌려가 야단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수의 감독 없는 정직한 시험을 요구하였고, 급기야 ‘나는 이 시험을 치름에 있어서 남의 것을 보지도 않았고, 또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음을 나의 명예를 걸고 서명한다고 시험지 첫 장에 싸인을 한 <Honor system> 제도 만들기를 강행하였다. 그랬건만 아래 학년 후배들이 어무 야단스레 한다고 비꼬는 통에 1년 만에 없어졌다. 그리고 본과 3학년 때에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멈쳐 서있던 시계탑의 침을 돌리는 <함춘월보> 글로 병원장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이화동이나 명륜동, 이화동 주민들이 매일처럼 오가며 보는 시계탑 침의 움직임을 보며 가슴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거나, 마지막 잎새를 보듯 서있는 시계침을 돌게 함으로써 죽어가는 입원환자의 마음을 달래준 이야기는 지금도 뿌듯한 쾌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본과 4학년 때에는  4.19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날 오후 1시 병실 실습을 보이콧하고 시계탑 B강당 (3학년 강의실)에 모여 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고, 병원의 들것(당까)를 병원 모르게 가지고 나와 흰 가운을 입고 채 적십자 마크를 그린 완장을 만들어 팔에 감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던 일,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이회백군은 우리보다 먼저 대학을 빠져나와 부정선거에 항거한 이회백군은  혼자서 국회의사당 앞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충에 맞아 부상당한 일을 잊을 수 없다. 특히 4. 19 의거 당일 우리 실습조(김동석, 김용일, 김광우, 김병수, 김창호 등)는 일방외과 실습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관에 학생들의 돌아 맞아 피를 흘리며 외과 외래를 찾았고, 5분 뒤에는 문리대 학생이 곤붕에 맞아 머릴를 다치고 외과에 와서 박길수 교수의 진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순서를 지킨다고 하였지만 경찰관은 우리의 적이고 의거에 참여하다가 다친 학생이 먼저 치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잠시 밖으로 나가셨다가 우리의 토의 장면을 보고 들으신 교수는 지나치는 말로 부상자에게는 적군이나 아군이 따로 없으며 오직 이들 모두가 부상병이라는 적십자정신을 손수 시범해보이시면서 우리를 그치셨다. 정말 우리는 지금에 비하여 훨씬 나약한 시설이나 시스템 속에서 공부하였으나 스승의 반듯한 가르침 속에서 오늘의 의사로 자란 후학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김용일
(1) 독일어 용어....
(2) 호연지기........
(3) 잊혀진 연건동 29번지 (1)
(4) 잊혀진 연건동 29번지 (2)
(5) 의예과 시절의 낭만 (1)
(6) 의예과 시절의 낭만 (2)
(7) 잊혀진 연건동 29번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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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B/SNU 제 15회  동기회/게재용‘2008. 5. 6. 작성

잊혀진 연건동 29번지 (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현주소는 우리가 입학하였던 1955년 때나 지금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28번지‘임에는 틀림없지만, 졸업한 지 반세기를 거치는 동안 숫한 구조물들이 사라지고 또 생겼다. 그리고 이곳을 연건동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도 새 도서관(1972년 준공) 관장직을 맡으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습지대여서 옆에 있는 연지동(蓮池洞; 이화동과 종로 5가 사이에 있는 돈네 이름)과 더불어 조금만 땅을 파도 물이 나왔고 매일 pump로 퍼내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도서관 지하는 높은 습기 때문에 서고(書庫)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옛날 생화학교술 건물 옆에 지하철 역(혜확역) 공지하 공사를 하면서 수맥(水脈)에 변동이 생기면서 목공실/기관실(boiler) 옆 굴뚝이 기울어지고, 본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벽이 5 cm나 벌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서울지하철공사와의 협의 끝에 생화학교실(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발생지이었음)을 헐고 새건물(1, 2학년 강의실을 새로 짓는 조건으로 당시 450억원을 받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물론 지하철 역사를 지으면서 6평 정도의 땅을 내어주게 되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여러 개의 새 건물이 들어서고 또 사라져서 내가 제대로 들어 온 것인가 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미국으로 간 동기들, 아니 오래 전 서울을 떠나 고향에서 개원하던 친구들도 손자들을 데리고 모교를 방문하면서 ‘할아버지가 다녔던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구경시켜준다고 교문을 들어섰다고 해도 옛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서글픔을 면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남대문(崇禮門)이 잿더미로 변한 화재로 우리의 서러움을 더하였지만, 우리의 모교가 변한 것을 보면 놀랄 것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의과대학 구내만 하더라도 사라진 것은 고사하고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던 정경이 사라진 것만 해도 한 두 개가 아니어서, 우리가 대학 시절을 상상하면서 돌아다녀보아도 머릿속에 새겨진 것들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선 의과대학 맞은편에 위치해있던 동숭동의 대학본부나 의예과시절을 보냈던 문리과대학, 그리고 의예과 자리는 이미 주택공사에 1970년대 초반에 매각되었고 아파트를 짓거나 음식점이나 술집으로 바뀌고, 그 돈을 보태 지금의 관악산 슬하의 서울대학교를 새로 지어 옮겨졌다. 다만 대학본부 건물의 모습은 기념비적인 역사성 때문에 부수지 않고 그대로 남긴다는 약속으로 그 자리에 한국문예진흥원이 차지 하였다. 문리대 운동장, 중앙도서관, 문리과대학 뒤의 총장공관이나 교수 관사 등은 모두 다시 매각되어 동숭동 연건동 일대에는 이제 의과대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대학다방(大學茶房)도 사라지고, 옷가게나 음식점, 술집으로 밀려나갔다.

  무어보다 의대-문리대 사이를 흐르던 대학천은 복개공사로 더 이상 옛 모습을 찾을 수도 없다.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던 밤이면 술에 취하여 대학로를 비틀거리며 거닐다가 대학천(大學川)에 빠진 친구들을 건져주던 낭만(오기?)이 없어진지도 이미 오래다. 대학로 밑 지하에는 지하철(제3호선) 역이 설치되어 혜화역에서 서울역까지 고작 15분도 걸리지 않고 갈 수 있게 바뀌었다. 비록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손가락질하던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의학부 생화학교실의 천평(balance) 축이 흔들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차(電車) 놓기를 거부하던 선배 교수들의 기개(氣槪)와 학문을 소중히 여기던 당시의 조선총독부가 이에 동조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의 일로 역사속으로 묻혀지고 있다. 오직 옛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라고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던 대학다방이 있을 뿐이었으나 작년에 헐고 새 건물이 섰다. 별장 다방은 아무도 모르게 가정집이나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면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럼 이제 4년을 함께 딩굴며 우리가 지냈던 연건동 의과대학 캠퍼스로 발을 옮겨보자.
 
  물론 큰 길을 향한 정면에는 고풍스런 연한 갈색 3층 건물(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은 60년 동안 그대로 서 있으나 ‘ㅁ’ 자 건물 대신 ‘ㄷ’ 자 로 바뀌었고(뒷쪽 맨 끝줄은 흘리고 그 자리에 7층 기초의학 연구동이 들어섰다. (총 대지 대비 건평 기준치를 넘는다는 이유로 동물실이 들어섰으나 새 물물실험실이 세워진 이후 냉동시설 등으로 교체되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병리학교실, 2층은 해부학교실과 법의학교실, 3층은 기생충학교실과 미생물학교실, 4층은 생화학교실과 의사학교실, 5층은 약리학교실. 6층은 예방의학교실과 의공학교실, 7층은 의공학교실과 전산실이 되었다. 각 교실마다 2층을 소망하였으나 심지 뽑기로 층수를 결정하였고, 각 층은 대, 중, 소 크기로 나누어 배분하였으며, 필자가 이 건물 계획 전체 작업을 분담하였기때문에 조건이 가장 열악한 (출입이 잦고 겨울에 추운 층이라는 이유로) 병리학교실 몫이 된 것이다.
 
  우리가 1학년 때 강의실로 사용하였던 1학년 계단강의실과 간호고등학교가 있던 단층 건물은 모두 헐리고 보건대학원이 들어섰으며, 그 조건으로 간호학과용 강의실 2개가 쓰기로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보건대학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조만간 보건대학원은 연건동 자리를 떠나 관악산으로 간다고 한다). 오직 우리 눈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색창연한 수위실괴 기초의학 본관뿐이 된 셈이다. 옛날 생화학교실(경성재국대학 의학부의 발상지)은 지하철공사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2층 본과 1, 2학년 강의실과 학생 서클 룸들이 들어서 학생회간이 되었다. 그리고 길 쪽 담장을 둘러싸던 은행나무는 모두 관악산으로 옮겨가고 키 낮은 철책만이 대학로와 구분되었다.
 
  그럼 의과대학에서 보낸 첫 2년 (1957. 4 - 1959. 3)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대학로에서 대학으로 들어오는 당시의 정문 말고 또 하나의 문이 새겼다. 옛날부터 있던 소방서를 옆에 끼고 새로운 문(대학병원이 커지고 환자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새로 생긴 문)이 생겼으며, 지금은 이름조차 서울대학교병원 후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물론 그 입구에는 의대 동창회가 40 여 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7층 함춘회관(함춘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리 동기인 심영보 동문이 심혈을 기울여 모금하고 설계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드렸던 건물). 과거 그 자리는 오래 전  경성의학전문학교이었음) 수원으로 이사간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Scofield 교수 부처가 관사로 사용하였던 3층집 집이었다가 정구장과 이발소로 바뀌었다가, 1990년도 초에는 다시 한국전력(주) 변전소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새로 지은 소아병원과 가정의학과와 영상의학과로 바뀌었다.
 
  본관을 끼고 지키고 있던 1층 약리학교실 옆 숱한 나무들이 채웠던 자리(이른 바 ‘약리 숲’이라고 불렀던 곳)은 사라졌고, 전 2학년 강의실은 흘리고 그 자리에는 China Medical Board와 대학본부의 도움으로 1972년에 3층짜리 (지하 1층 포함) 근대식 의학도서관이 들어섰으나 1층을 증축하여4층이 되었다.
 
  구 2학년 강의실 앞에는 미국 콘센트로 지은 가건물이 있고 그 속에는 경모장(다방)이 있어서 늘 고전음악을 들려주었고, 그 옆방에서는 학생회가 있어서 대의원회나 무의촌 진료계획을 짜곤 했던 곳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단층 빨간 벽돌 건물집인 대학신문사가 있긴 했으나 지금은 관악산으로 옮겨갔고 헐리고 없다. 
 
  의대 본관 오른쪽 뒤 (보건대학원 옆)이 있던 해부학 분실(우리들이 cadaver dissection을 하던 해부학실습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5층 해부-생리관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여러 연구소들이 들어서 있다.  몰론 임상연구실(빨간 벽돌로 된 3층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소아병원(나중에 건강검진센터, 방사선과가 들어선 부속건물이 추가되어 들어섰다.

김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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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용아 잘 가라 (2)
그의 졸업후 활동을 뒤돌아보며
김용일

  지난번에는 강창욱 동문이 편집하는 Yesterday에서는 장가용군의 대학 및 군 근무 시절에 대해 잠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그의 퇴직 후 생활을 간략히 소개하며 그를 떠나보낸 동기 한 사람의 아쉬움을 달랠까 한다.

1. 해결사 장가용 교수의 제주의대 학장 시절

  장가용군은 1996년 9월부터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설립을 위한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파견근무를 시작하였고, 뒤이어 초대 학장(1998. 3 - 1999. 8)으로 대학설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이 대학은 제주 시내에 있는 신설의대이고 한 학년 당 40명을 선발하는 소규모의 대학이기는 하였으나 꽤 알찬 대학이었다, 그러나 장 학장은 입학생의 90%가 육지 출신이라는 데에 자주 불만을 토로하였다. 사실 제주도에는 그 정도의 졸업생을 수용할 지역사회의 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심기는 날이 갈수록 불편해 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부속병원이 없는 상태에서 설립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초기 졸업생들의 임상실습을 담당할 대학부속병원이 없어서 제주의료원(구 제주도립병원)을 대학병원으로 인수하는데 정성을 다 쏟았다. (나중에 그는 제주대학교 총장, 도지사, 제주의료원장 등을 설득하여 이 난제를 원만히 해결한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임상계 전임교수를 확보하려는 집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일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일차적으로는 서울의대 교수를 시간강사로 초청하여 강의를 부탁하는 전략을 펴는 한 편, 교수 정원을 얻기 위하여 총장과 정부를 설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정부는 의사의 과잉배출을 우려하여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정규 교수를 초빙하되, 교수로서의 기초적인 자질을 가진 교수를 전국에서 찾고자 하였던 바, 이 정경은 마치 희랍시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인재를 찾고자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데네 뒷골목을 헤맸다는 에피소드를 연상케 하였다. 그는 워낙 고지식하고 수준이 높은 학자인지라 자질이 검정되지 않은 교수를 전임교수로 초빙하려 하지 않았고, 여의치 않자 결국 모교인 서울의대 각 주임교수를 설득하여 졸업생 중 출중한 후배를 선발하여 충원하였고, 그 배경에는 모교 출신들이 지닌 책임감과 학문적 의지를 제주의대에 심고자 하였던 장 교수의 뜻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부족한 전임교수를 아무나 모시기보다는 정성을 들여 모교 교수들을 시간강사로 모시려 하였고, 이들의 수업이 끝나는 날 저녁이면 으레 제주 시내 일식집에 데리고 가서 저녁 대접을 하고 정종으로 피로를 풀게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 주마다 이런 행사를 치러야 하였음을 생각할 때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무리하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세운 이 대학은 이제 어엿한 마지막 국립의대로 탈바꿈 하였고, 그 뒤에는 언제나 지친 몸을 이끌고 대학을 세웠던 장가용 학장이 있었던 것이다.
  2년간의 파견 임기를 마치고 쉬지도 못한 그는 퇴임 후 모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한동대학교(漢東大學校, 포항 소재) 의과대학장으로 초빙되어 갔으나,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하고 (졸업생을 미국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의사가 되도록 한다는 무리한 재단 측의 계획)에 맞서 끝까지 정규화하려다가 사의를 표하였으며, 결국 부임 초기의 의지를 펴지 못하고 도중에 퇴임하였다.

2. 지병(持病)과의 싸움

  더욱이 그는 오래 전부터 당뇨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병 치료를 등한히 하였던 것은 틀림이 없다는 것이 서울의대 해부학교실이나 제주의대에 근무하던 후학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이었다. 기초의학자이면서 제주도민이 아니라는 지리학적/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디디고 전임교수를 초빙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음은 알 사람은 알리라.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그가 결국 당뇨병으로 인한 신병증(diabetic nephropathy) 때문에 사망 전까지 매주 신투석(hemodialysis)을 받아야 했고, 그리고 이에 더하여 동맥경화증의 합병증 치료를 뒤로 하였으며, 오직 대학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다가 결국 하지 절단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일은 제도의대 학장 시절에는 극히 가까운 제주의대 교수나 출신 교실의 고수들만 알고 있었을 뿐, 동기들까지도 이를 눈치체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국내의 많은 동기들은 그저 소문으로만 그의 질병과의 투쟁 이야기를 듣고 전화로 방문의사를 밝혔으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는 이유(?)로 끝까지 친구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3. 장 교수의 연구분야

  그의 연구는 해부학 중에서도 림프계의 면약반응에 대한 조직학적 연구이며 대한해부학회 회장의 격무와 해부학교실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일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테니스로 자신의 몸 관리를 할 수 있다고 한 것 같았다. 정말 자기 분야의 학문 이외에는 무식하리만치 자신의 병 치료에 게을렀다. 특히 그의 관심은 학생들에게 대한 애착과 해박한 면역학적 반응 연구이었고, 특히 비장이나 림프계의 근원적인 조직발생이나 조형기능 연구는 익히 그의 논문으로 일찍부터 증명한 바 있다.
  미국에서의 연구생활에서는 우리보다 3년 선배인 김윤범 교수(시카고 대학)와 함께 germ-free animal에서의 면역 반응 연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를 더욱 활성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연구여건이 열악하여 그의 뜻을 지속적으로 충분히 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cadever 실습에는 그렇게 정성을 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4. ‘서서 이야기해라’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자. 그는 아버지인 장기려 교수 (전 서울의대 외과교수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 절제수술을 시행한 분) 슬하의 6남 중 제일 아래  아들로서, 아버지인 장기려 교수는 잘 알려진 성인군자로서 부산 인제의대 교수, 보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근무하였으며,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막사이사이 평화상)을 수상하신 분이였으며 이광수 선생이 쓴 소설(사랑)의 모델이라고 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장가용군을 데리고 단 둘이서 6.25 시에 월남하였으나, 이직도 어머니가 이북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의 이북 방문으로 확인되었으며, 어머니와의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이야기는 세상이 다 아는 정도의 효자였다.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유난히 키가 작았던지라 멀리서 보면 앉아 있는지 아니면 서 있는 것인지 알기 힘들어 때로 친구들은 서서 이야기하는 그를 향하여 ‘서서 이야기하라’고 농을 걸며 좌중을 웃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의 친한 친구 중에는 미국에 있는 차철준 군, 학내에서는 이대일 군이 있다. 차군과 장군은 둘 다 경복고 출신이고 키도 작아서 그런지 오랫동안 왕래가 있었고 재학시절부터 매우 가깝게 지났다고 한다.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가 매겨져 있던 때라 같은 실습 팀으로 편성되어서 그런지 이들 두 사람은 늘 함께 다니곤 하였고, 그 의 친구 사귐도 따져보면 매우 선별적이었으나 누구에게나 친절하였다.

5. 매듭을 지으며

  그에게는 안과 전문의인 윤 선생이 종로구 명륜동에 개원하고 계시고, 장남은 의사가 되어 현제 인제의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장기려 교수 이하 가족 대부분이 의사이니 의사집안이라고 해도 괜찮을 성 싶다. 이제 가용군은 우리 곁을 떠났으나 그 처럼 효자이고 애처가이며, 직분에 충실한 친구도 흔치 않은 기초의학자를 우리는 잃은 셈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책 펴고 공부하려 하는 그를 이제 놓아주련다. 편히 천당으로 가서 쉬어라. 
장가용 학형을 떠나 보내며 (1)

    김용일   


  지난 1월 18일 그렇게 정답게 40년을 함께 지났던 가용군이 그의 가족과 우리 동기들을 남겨놓고 먼저 훌쩍 이 세상을 떠났다. 학문 앞에서는 그렇게 냉철하면서도 막걸리집이나 점심 장소에서 그처럼 다정할 수 없었던 친구를 잃는 마음을 너는 아는가. 서울대학교병원 2층 6호실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影幀)을 물거름이 쳐다보다가 울컥하는 비애와 생의 서글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 던 것이 나도 모르게 그가 정년퇴임할 때가지 지켰던 연구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30여년을 지켰던 그의 방을 물거름이 쳐다보다가 그만 우리 손으로 세웠던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 곁에 주저앉아 한참 옛날 생각을 하면서 그의 넋을 달랜다. ‘잘 가라, 이놈아’ 하고 야속해하면서 말이다.

  1957년 11월 초겨울 본과 1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들 15회 동기 132명은 일인당 1만환씩 거두어 우리의 해부실습을 위하여 시체를 내어준 영령들의 넋을 달랜다는 이유로 비석을 세우기로 용단(?)을 내렸다. 해부실습을 하면서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는 의견에 모두들 동의하고 전원이 이 결정에 동참하였다. 200 여 만환의 거금(당시는 그랬다)은 모아졌으나 비석에 무엇이라고 새겨야 할지를 놓고 싱갱이 끝에 비석 걸립에 앞장섰던 6명이 장가용군을 앞세워 (고) 나세진 교수실을 찾았다. 장가용군은 그의 아버지(장기려 교수) 덕에 나세진 교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드리자 나 교수는 역정을 내시면서,

이놈들아. 요컨대 ‘우리는 감사한다’ 그런 뜻을 담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우리의 옹졸함을 야단치셨다(그래서 비석명이 ‘우리는 감사한다’가 된 것을 가용이 너는 기억할 것이다). 마침 김동석군이 서대문에 위치한 비석 집을 알아 와서 드디어 1957년 1월 겨울방학 중에 비석 제막식을 갖게 되었지. 몰론 나세진 교수를 모시고 오는 일에 나는 장가용군과 함께 가서 독일인 교수(나세진 교수를 방문 중이었던 해부학 교수) 손님을 모시고 와서 제막식을 마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교수는 독일말로 더듬더듬 격려사를 하셨으나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는 친구도 그 독일인 교수도 없었다(엉망진창인 발음 때문이었다고 킥킥대었지). 그 이후 5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매년 의과대학 의학과 1학년 학생들은 해부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그 비석과 해부학실습실 사이 마당에서 막걸리와 떡을 사다놓고 제사를 지내곤 하였던 자네가 아닌가. 때로는 가용군이 사체 해부의 소중함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정신으로 실습에 임할 것을 당부하던 자네를 보던 생각이 불현듯 되살아나는구나. 그리고는 식이 끝난 후 나는 늘 가용군과 함께 제사상에 차려진 막걸리를 마시면서 그 옛날 비석을 만들던 생각을 더듬었지. 그러던 녀석이 이처럼 멀리 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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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4월 장가용군과 이대일군 그리고 나 도합 세 사람은 많은 동기생들이 자신의 인생행로로 정하기 꺼리던 기초의학의 길에 무급조교 겸 대학원생으로 들어갔다. 장가용군은 키가 작았지만 매우 다부졌고, 교실의 많은 교수들(나세진, 이명복, 장신요, 김재남, 성기준, 이광호 등 이상 전임강사-교수급)과 조교(백상호, 나봉진, 장가용)들이 기라성처럼 버티고 있어서 학생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으나 장가용군만은 정이 많아 학생들이 따르던 친구였다. 그래도 우리가 학생 때 알던 가용이와는 달리 성격이 매우 치밀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있어서 교실 살림을 도맡아 하곤 하였다. 

<에피소드 1> 장가용 ‘조교수’ 수상

  가용군이 해부학교실 조교 때의 일이다. 당시 의협신보(현 의협신문)에서는 서울의대 생리학교실의 이상돈 전임강사가 제1저자가 되고 장가용 조교와 장신요 교수가 공동저자가 되어 동위원소를 이용한 조직발생에 대한 실험연구가 수상을 하게 되었다고 대서특필하였다. 그 정도의 수준이면 장가용군은 조교가 아니라 조교수일 것이라고 생각한 신문기자는 (그래서인지) 그를 장가용 조교수라고 기사를 썼던 것 같았다. 내가 전화로 수상을 축하하자, 무급조교가 조교수보고 존댓말을 쓰지 않고 축하한다고 일갈(一喝)성 농담을 하던 유모어 감각이 뛰어난 친구이기도 하였다.   

<에피소드 2> 제7후송병원에 둥지를 튼 장가용 대위

  1964년 우리는 3년의 조교생활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군의학교로 가서 군입대를 하게 되었다. 많은 기초의학 입대자들은 되도록이면 연구분위기가 되어 있는 부대이면서 서울 근교에 있는 의정부 창동 소재 제7후송병원 부설 유행성 출혈열 연구반(EH Fever Research Center)에 배치되기를 소망하였다. 제일군(第一軍)에 속하면서 서울에 가장 가깝게 위치하였기 때문에 집에서 출근할 수 있고 모교 방문이 간응 위치여서 누구나 소망하던 곳이었다. 나 역시 그곳에서 공부하기를 원했으나 나 나세진 당시 의과대학 학장님은 나의 추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이미 장가용군을 추천해두었으니 해줄 수 없다는 야속한 거절이었다. 마침 교무과장이던 이찬범 교수(흉부외과학)가 현장에 계셔서 학장님의 단호히 거절하시는 것을 보고는 자진해서 도움을 주셔서 이대일군과 내가 함께 원주에 있는 야전의무시험소로 가게 되었다. 언제나 장가용군에게 판정패 당했던 때여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에피소드 3> 장가용 소령과 김용일 대위

  군 근무시 그는 일주일이면 한 번씩 보건사회부 산하 국립보건원(불광동 소재)에 들러 유행성 출혈열 환자 혈청을 전해주고 내가 있던 수도육군병원에 들리곤 하였다. 참 부럽기도 했던 장대위였으나 결국 나는 수도육군병원 병리시험과로 불려오고 이대일군은 원남 비둘기부대를 지망하여 3명의 동기가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또 장가용군에게 판정패를 당한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있었다. 군 근무 임기 말이 되면서 중견 군의관 부족으로 우리 모두가 근무기간의 연장설이 돌았고, 모두 소령 진급 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마침 ECGFMG 합격증을 가진 친구는 제대를 할 수 있다는 명분이 발표되어 나는 병리학교실 이성수 교수의 병리학교실 입국 요구조건이었던 ECFMG 없이는 입국을 불가능한다는 협박통에 졸업 시에 이 시험을 치렀고 덕택에 3년 만에 제대하였지만, 장가용군은 해부학 전공이라 ECFMG가 필요가 없어서 응시하지 않아, 결국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제대하는 7월 4일 군 제대를 앞두고 장가용군을 만나 「어이 가용아. 나먼저 간다.」하고 부르니 이미 소령 뱃지를 달았던 장가용군이 “상급자에 가용이라고 부르다니...」하지 않는가. 그런 여유를 가지며 불평하나 하지 않고 군생활을 즐겼던 사나이였다.


  덕택에 나는 장가용군보다 1년 반이나 앞서 대학 전임강사 발령이 났으니 나는 드디어 장가용군보다 앞설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1068년 그가 대학에 들어올 때 ‘너의 형님이 자네의 전임강사 발령을 축하하노라.」 하고 전화를 하면서 새옹지마 같은 삶을 함께 살았다. 군 근무 시 장소령이 나에게 「야 용일아. 강사 발령을 축하한다.」고 전화를 걸어왔으나 나는「이제는 네가 나한테 형님이라고 할 차례다」라고 대응하였던 생각이 난다.

   그는 대학이 중심이 되어 통합교육이다 선택과목제 등 교육계획을 질색하였고 각 교실이 하는 학문적 자율성에 대하여 대학이 ’콘놓아라 팥놓아라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교수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짜면서 명강의(혈액, 림프계 해부/조직학 강의를 즐겼다. 좀 자유주의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게 입방아를 찌으면서도 37 여년을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정말 그는 멋진 삶을 여유롭게 살았고 많은 대학에 불려 다녔다. 특히 이대일군과는 매우 가까이 지내어 자주 대학로(문리과 앞 대학천이 흐르던 길)의 여러 음식점에서 자주 취중 농담을 즐겼으나, 수업 전날은 절대로 시간을 내지 않고 착실히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고 해서 술잔을 기울일 수 없었다. <제2부는 다음에 다시 보내기로 약속한다.) 더기회 총무를 맡아서 일을 하다가 회장을 한 후 다시 총무를 맡아서 우리 동기 일을 심영보군과 일을 했던 친구였다. 가족을 남겨놓고 먼저 가버린 가용 이 녀석아. 잘 가라,  아버지 장기려 교수님을 먼저 만나 뵙고 북한에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드려라.

  (다음 제2부에서는 제주의대 학장, 한동의대(?) 학장 시절의 장가용 교수의 개인생활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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