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SNU 제 15회 동기회/게재용‘2008. 5. 6. 작성
잊혀진 연건동 29번지 (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현주소는 우리가 입학하였던 1955년 때나 지금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28번지‘임에는 틀림없지만, 졸업한 지 반세기를 거치는 동안 숫한 구조물들이 사라지고 또 생겼다. 그리고 이곳을 연건동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도 새 도서관(1972년 준공) 관장직을 맡으면서 알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습지대여서 옆에 있는 연지동(蓮池洞; 이화동과 종로 5가 사이에 있는 돈네 이름)과 더불어 조금만 땅을 파도 물이 나왔고 매일 pump로 퍼내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도서관 지하는 높은 습기 때문에 서고(書庫)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옛날 생화학교술 건물 옆에 지하철 역(혜확역) 공지하 공사를 하면서 수맥(水脈)에 변동이 생기면서 목공실/기관실(boiler) 옆 굴뚝이 기울어지고, 본관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벽이 5 cm나 벌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서울지하철공사와의 협의 끝에 생화학교실(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발생지이었음)을 헐고 새건물(1, 2학년 강의실을 새로 짓는 조건으로 당시 450억원을 받아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물론 지하철 역사를 지으면서 6평 정도의 땅을 내어주게 되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여러 개의 새 건물이 들어서고 또 사라져서 내가 제대로 들어 온 것인가 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미국으로 간 동기들, 아니 오래 전 서울을 떠나 고향에서 개원하던 친구들도 손자들을 데리고 모교를 방문하면서 ‘할아버지가 다녔던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구경시켜준다고 교문을 들어섰다고 해도 옛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서글픔을 면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남대문(崇禮門)이 잿더미로 변한 화재로 우리의 서러움을 더하였지만, 우리의 모교가 변한 것을 보면 놀랄 것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의과대학 구내만 하더라도 사라진 것은 고사하고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던 정경이 사라진 것만 해도 한 두 개가 아니어서, 우리가 대학 시절을 상상하면서 돌아다녀보아도 머릿속에 새겨진 것들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선 의과대학 맞은편에 위치해있던 동숭동의 대학본부나 의예과시절을 보냈던 문리과대학, 그리고 의예과 자리는 이미 주택공사에 1970년대 초반에 매각되었고 아파트를 짓거나 음식점이나 술집으로 바뀌고, 그 돈을 보태 지금의 관악산 슬하의 서울대학교를 새로 지어 옮겨졌다. 다만 대학본부 건물의 모습은 기념비적인 역사성 때문에 부수지 않고 그대로 남긴다는 약속으로 그 자리에 한국문예진흥원이 차지 하였다. 문리대 운동장, 중앙도서관, 문리과대학 뒤의 총장공관이나 교수 관사 등은 모두 다시 매각되어 동숭동 연건동 일대에는 이제 의과대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대학다방(大學茶房)도 사라지고, 옷가게나 음식점, 술집으로 밀려나갔다.
무어보다 의대-문리대 사이를 흐르던 대학천은 복개공사로 더 이상 옛 모습을 찾을 수도 없다.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던 밤이면 술에 취하여 대학로를 비틀거리며 거닐다가 대학천(大學川)에 빠진 친구들을 건져주던 낭만(오기?)이 없어진지도 이미 오래다. 대학로 밑 지하에는 지하철(제3호선) 역이 설치되어 혜화역에서 서울역까지 고작 15분도 걸리지 않고 갈 수 있게 바뀌었다. 비록 일제시대의 잔재라고 손가락질하던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의학부 생화학교실의 천평(balance) 축이 흔들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차(電車) 놓기를 거부하던 선배 교수들의 기개(氣槪)와 학문을 소중히 여기던 당시의 조선총독부가 이에 동조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의 일로 역사속으로 묻혀지고 있다. 오직 옛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라고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던 대학다방이 있을 뿐이었으나 작년에 헐고 새 건물이 섰다. 별장 다방은 아무도 모르게 가정집이나 중국 음식점으로 바뀌면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럼 이제 4년을 함께 딩굴며 우리가 지냈던 연건동 의과대학 캠퍼스로 발을 옮겨보자.
물론 큰 길을 향한 정면에는 고풍스런 연한 갈색 3층 건물(일본 강점기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은 60년 동안 그대로 서 있으나 ‘ㅁ’ 자 건물 대신 ‘ㄷ’ 자 로 바뀌었고(뒷쪽 맨 끝줄은 흘리고 그 자리에 7층 기초의학 연구동이 들어섰다. (총 대지 대비 건평 기준치를 넘는다는 이유로 동물실이 들어섰으나 새 물물실험실이 세워진 이후 냉동시설 등으로 교체되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병리학교실, 2층은 해부학교실과 법의학교실, 3층은 기생충학교실과 미생물학교실, 4층은 생화학교실과 의사학교실, 5층은 약리학교실. 6층은 예방의학교실과 의공학교실, 7층은 의공학교실과 전산실이 되었다. 각 교실마다 2층을 소망하였으나 심지 뽑기로 층수를 결정하였고, 각 층은 대, 중, 소 크기로 나누어 배분하였으며, 필자가 이 건물 계획 전체 작업을 분담하였기때문에 조건이 가장 열악한 (출입이 잦고 겨울에 추운 층이라는 이유로) 병리학교실 몫이 된 것이다.
우리가 1학년 때 강의실로 사용하였던 1학년 계단강의실과 간호고등학교가 있던 단층 건물은 모두 헐리고 보건대학원이 들어섰으며, 그 조건으로 간호학과용 강의실 2개가 쓰기로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보건대학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조만간 보건대학원은 연건동 자리를 떠나 관악산으로 간다고 한다). 오직 우리 눈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색창연한 수위실괴 기초의학 본관뿐이 된 셈이다. 옛날 생화학교실(경성재국대학 의학부의 발상지)은 지하철공사와 더불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 2층 본과 1, 2학년 강의실과 학생 서클 룸들이 들어서 학생회간이 되었다. 그리고 길 쪽 담장을 둘러싸던 은행나무는 모두 관악산으로 옮겨가고 키 낮은 철책만이 대학로와 구분되었다.
그럼 의과대학에서 보낸 첫 2년 (1957. 4 - 1959. 3)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대학로에서 대학으로 들어오는 당시의 정문 말고 또 하나의 문이 새겼다. 옛날부터 있던 소방서를 옆에 끼고 새로운 문(대학병원이 커지고 환자들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새로 생긴 문)이 생겼으며, 지금은 이름조차 서울대학교병원 후문이라고 불리고 있다). 물론 그 입구에는 의대 동창회가 40 여 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7층 함춘회관(함춘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리 동기인 심영보 동문이 심혈을 기울여 모금하고 설계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드렸던 건물). 과거 그 자리는 오래 전 경성의학전문학교이었음) 수원으로 이사간 수의과대학 교수였던 Scofield 교수 부처가 관사로 사용하였던 3층집 집이었다가 정구장과 이발소로 바뀌었다가, 1990년도 초에는 다시 한국전력(주) 변전소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새로 지은 소아병원과 가정의학과와 영상의학과로 바뀌었다.
본관을 끼고 지키고 있던 1층 약리학교실 옆 숱한 나무들이 채웠던 자리(이른 바 ‘약리 숲’이라고 불렀던 곳)은 사라졌고, 전 2학년 강의실은 흘리고 그 자리에는 China Medical Board와 대학본부의 도움으로 1972년에 3층짜리 (지하 1층 포함) 근대식 의학도서관이 들어섰으나 1층을 증축하여4층이 되었다.
구 2학년 강의실 앞에는 미국 콘센트로 지은 가건물이 있고 그 속에는 경모장(다방)이 있어서 늘 고전음악을 들려주었고, 그 옆방에서는 학생회가 있어서 대의원회나 무의촌 진료계획을 짜곤 했던 곳이 있었으며, 그 뒤에는 단층 빨간 벽돌 건물집인 대학신문사가 있긴 했으나 지금은 관악산으로 옮겨갔고 헐리고 없다.
의대 본관 오른쪽 뒤 (보건대학원 옆)이 있던 해부학 분실(우리들이 cadaver dissection을 하던 해부학실습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5층 해부-생리관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여러 연구소들이 들어서 있다. 몰론 임상연구실(빨간 벽돌로 된 3층건물)은 헐리고 그 자리에 소아병원(나중에 건강검진센터, 방사선과가 들어선 부속건물이 추가되어 들어섰다.
김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