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연건동 28번지 (2)
1. 함춘원 숲에서 즐긴 오수(午睡)
의예과를 끝내고 길 건너 의과대학으로 건너 왔을 때(1957년 4월) 학교 분위기는 정말 썰렁했다. 흰 까운을 입고 병원으로 오고 가는 선배들 틈에 끼여 의예과 시절의 낭만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크다란 눈망울만 초롱초롱한 선배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들 틈에 끼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났던 본과 1학년이 불현듯 생각난다. 그런 속에서도 함춘 동산의 우거진 소나무나 참나무 그늘 밑에서 오수(낮잠)를 즐기며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스. 케-기’ 를 부르짖으며 한 개라도 더 팔려는 소년의 애처로운 소리, 간혹 창경원에서 날아드는 꿩 나는 소리를 듣던 생각이 날 때는 정말 낭만이 따로 없다고 들 하면서 잠이 들었다(물론 지금은 그 동산이 없어졌다). 특히 Petrous bone 속에 숨어 있는 21개의 구멍 길을 외우라 치면 이 오수처럼 즐거울 때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이 양철러 만든 아이스캐이키 통을 들고 잠 깨우는 소년을 나무라는 친구가 없는 것을 보면 정말 맛보다도 시원한 입안에서 녹아내리며 잠을 깨우던 그 아이스 케이키(아마도 한 개 10 원인 듯싶다) 갇던 낭만이 아직도 의예과 데와느는 또 다른 기븜이기도 했다.
2. 후배의 군기 잡는다고 후배들을 못살게 1년 선배들
특히 나에게는 본과 2학년 시절은 시련이 한꺼번에 돌려든 시기이도 했다. 1년 선배 (본과 2학년)한테 등굣길에 인사(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생 강실(腔室, 2학년 강의실 옆에 화장실 옆에 있던 조그만한 방으로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었음)로 끌려가 나를 쌀가마니로 뒤집어씌우고는 여러 선배한테서 발길질 당하는 일(일본말로 후구로 다다끼) 등 린치 사건이 매일 한 두건이 터지곤 했다 (그 후 25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선배를 일본의 조기위암 세미나 장에서 알아내고 그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지성인이 모인 의대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우리 Ep 이흐부터는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대 15회 졸업생은 학생 때부터 유난스럽다고 후배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첫 시간이 되기 전에 10여명의 친구들은 약리 숲을 가로 질어 2학년 강의실 앞을 지나가는 음대 여학생들을 놀려대는 재미로 일찍들 등교하였고, 그중에는 결혼으로 골인하는 이용노군 같은 couple이 생기기도 하였다.
3. 대강당에서의 희한한 쿼터 시험 치르기와 소위 Honor System
우리 학급 동료들은 의협심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강하였으며, 특히 돌출적인 행동으로 주변의 교수들이나 선후배들을 놀래게 하거나 주목을 받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본과 1학년으로 올라와 동숭동에서 연건동으로 이사온 시절에 시작한 quarter 시험부터는 본과 2학년 시절 때부터 생긴 오너 시스템(honor rystem)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학 당국은 시험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2개 학년 학생들을 한꺼번에 대강당에 몰아넣고 한 줄은 1학년 옆줄은 2학년 (나중에는 3학년)을 번갈 앉히고 부정행위를 방지한다는 정책을 폈다. 우리는 이 무례한 정책에 대항 반항하였고, 무언의 저항으로 나는 학생과장실에 끌려가 야단맞기도 했다(실은 나는 1학년 후학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반회를 열어 나를 학급 대표로 뽑았다. 물론 그 당시의 반대표의 역할은 ‘난로 없는 설렁한 강의실에서의 강의 휴강 시키기’가 주된 임무였다). 이러한 강압적인 시험 치기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수의 감독 없는 정직한 시험을 요구하였고, 급기야 대표 서너 명(최용성 군과 대표 둥 4명이 앞장 섬)을 뽑아 나세진 학장님을 찾아가 ‘깡패 같이 보였던 조교들에 둘려 쌓여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인격 모독임을 주장하고 조교들의 감독을 폐지시켜 줄 것을 설파하려 했다. 당시 강당에는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하나의 연결형 책상/의자에 4명의 학생이 앉아서 서로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학교의 이러한 내심은 ‘나는 이 시험을 치름에 있어서 남의 것을 보지도 않았고, 또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음을 나의 명예를 걸고 서명한다’고 시험지 첫 장에 싸인을 한 <Honor system> 제도 만들기를 강행하였다. 그랬건만 아래 학년 후배들이 너무 야단스레 한다고 비꼬는 통에 1년 만에 없어졌다.
4.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 세우기
우리는 서울 청계천 입구에 있던 서린 호텔(지금은 없어짐)에서 졸업 25주년(졸업 후 첫 모임)을 자축하고(회장 : 김용일) 재회의 기회를 가졌다. 졸업 후 많은 친구들을 처음 만나면서 반가움을 나누어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우리 대학 동기회의 첫 문집이 되었다. 그 때 발간한 책 이름이 바로 ‘우리는 감사한다’이었다. 표지는 김진호 동문의 시계탑 그림(수채화)이었는데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 즉 우리는 역사를 창조하지 뒤따르가지 않는다는 말없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책 전반부 1/3은 15회(마침 우리 동기회가 제 15회와 깍 맞추어졌다)에 걸쳐 심영보 동문의 자상한 동기 수상집이 우리의 이 창조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편집위원들이 이에 찬동하여 이 글을 중심으로 책을 편집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국내외 동기들이 보내준 글로 된 수상집이 되었던 바 뒤이은 서울의대 졸업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지금은 많은 동기회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책이 정기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 책을 보면 제각기 경험한 그리고 우리들까지도 채 몰랐던 이야기로 실려 있어서 회상의 기쁨을 더욱 진하게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가졌던 이 ‘우리는 감사한다’ 수상집은 혜화동에 살던 장가용 군 집에서 윤곽을 잡기 시작하였으며, 김용일, 심영보, 김진호, 장가용, 조일균 동문 등이 두 번이나 만나서 편집회의를 가졌다. 그 집은 매우 아담한 집이었으며, 앞쪽은 장군의 부인이 개원했던 윤안과가 있었고 옆과 뒤는 살림집이었다). 장군의 아버지였던 장기려 교수는 부산 복음병원(현재의 고신의대 부속병원) 원장이었으나 워낙 물질사회와는 등진 청렴결백한 분이셔서 모든 살림은 장군의 쥐꼬리만 한 해부학 교수 봉급과 부인의 개원으로 꾸려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의 뱡향은 우리 동기들의 현 위치와 보람, 그리고 앞을 내다본 임무가 중심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마음속에 심어 있었다. 마침 심영보 동문의 글이 연속으로 의사신문에 연재되어 있는 글을 심형으로부터 얻어서 재미 동기들이나 이를 보지 못한 국내 동기들이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글을 중심으로 편집하되, 모든 동기들이 한 편씩 글을 보내도록 하기로 입을 모았다. (그리고 보니 그 당시 졸업 25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우리를 의사의 길로 가게 해 주신 은사를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제2차 경주 모임에서는 모교방문으로 이 아쉬움을 달랬다).
이 25주년 기념행사 때의 주제는 당연히 「우리는 감사한다」였고, 25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자랐고 가족이 이렇게 많아졌는가를 서로 알게 되었는가 하면, 재학 당시의 생각이 어떻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시에 이 모임이 우리의 보람이 됨은 물론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동기생들의 reunion은 제9회 졸업생(1950, 회장 최진학, 작고)이 먼저 시작하였다). 지금도 연건동 20번지에 남아 있는 우리의 고색창연한 모교(기초의학) 정원에는 숫한 비석이나 동상 등이 서 있거나, 제7회 동기 등 여러 동기들이 심어준 고가의 멋진 소나무 들이 부산에서 실려 왔지만, 이러한 모교 뜰에 무엇인가를 기념비적 뜻을 남긴 효시는 아무래도 우리 15회 동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마련한 사연 많은 ‘우리는 감사한다’라는 알송달송한 이름의 비석이 아닌가 싶다. (자세한 기록은 첫 수상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보낸 멋있는 의과대학 생활을 보낸 흔적은 지금도 (해부학 실습이 이루어졌던 해부-병리학 분실 앞 느티나무 옆 나지막한 동산에 선 채 4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고 서 있고 그 느티나무는 비록 고목이 되었지만 그대로 우리를 맞고 있다.
5. 하숙집에서 쫓겨난 이야기
본과 1학년 1학기 때(1957)의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부학은 의학공부의 밑거름이고 의학용어에 접하는 첫 단계이니 본과 1학년에 진입한 시간부터 학생들의 진을 다 빼놓게 한다. 그 중에서도 두개골 이름외우기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어서 재시험이다 F학점이다 하여 해마다 많은 동료 친구들을 울린다. 외울 것도 많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내이(內耳)를 담고 있는 뼈(petrous bone)는 하도 복잡하여 해부학 책에 실린 그림만으로는 뼈 속에 숨은 21개나 되는 미로의 주행(走行)을 알아맞히기조차 힘들다.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아도 알아듣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해부학교실에서는 두개골 표본을 학생들에게 빌려주지도 않으니 학생들은 선배들로부터 전수(傳受)되어 내려오는 두개골 표본이 제 차례가 되기를 기다릴 수 없어서 아예 다른 의과대학 학생들로부터 남몰래 빌리곤 하였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연인(戀人)의 도움으로 나 역시 간신히 다른 의과대학에 다니던 친구가 가진 두개골을 빌렸다. 그리고는 매일 이 해골을 큰 가방에 넣어 등교했다가 학교에서는 개인함에 옮기고 저녁에는 도서관으로 가져와서 공부하였지만, 시험 철이 다가오면서 외워도 잊어버리는 자신이 처량한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또 급하기도 하니 하숙집까지 감추어 가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게 보자기를 끌러 옆방의 주인집 식구들이 모르게 두개골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하숙집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을까하고 신경이 쓰여 시험 며칠 전부터는 아예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에서 해골을 꺼내고는 이불을 뒤집어쓴 뒤 손전등을 켜고 늦게까지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해부학 시험 이틀 전 날 밤 나는 전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개골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모양이다. 주변이 시끄러워 잠을 깨었는데 어떤 여인의 비명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도둑놈 잡아라.’ 하고 지르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소리였다. 알고 보니 도둑놈이 늦은 밤 하숙집에 들어왔다가 불을 켠 채로 자는 안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내 방문을 열어보았다가 내가 해골을 가슴에 품어 안고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다가 마당에 있는 물통을 엎질러 하숙집 아주머니를 깨웠던 모양이다. 이 소동이 난 지30분 쯤 된 후 아주머니가 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위로해 줄려고 내 방에 들어왔다가 내가 해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소스라쳐 놀라 다시 소리를 지르며 내 방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하숙집 남편 되는 집주인이 내방을 찾아왔다. 그분의 이야기인 즉 간밤 주인집 아주머니가 내방에 와서 두개골을 보고 간 후 밤새 시름시름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또 자라는 아이들도 있어서 집안에 해골이 있으면 부정을 타니 오늘 중으로 나보고 다른 데로 하숙을 옮겨달라고 하지 않는가.
여하튼 이렇게 해서 나는 문리과대학 의예과에서 의과대학으로 옮겨온 지 두 달 만에 돈암동에 있던 하숙집을 딴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졸업하고 40년이 넘는 지금도 해부학(골학) 생각만 하면 하숙집에서 쫓겨난 생각이 떠오르곤 하여 자다가도 고소(苦笑)를 짓는 통에 이 사정도 모르고 옆에서 곤히 자는 아내를 놀라게 한다.
오늘도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밤을 새는 학생들을 연상하면서 의과대학생들이 이처럼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한다.
6. 시계탑의 침을 돌려라
본과 3학년 때에는 6.25 이후 오랫동안 멈추어 서있던 시계탑의 침을 돌리는 <함춘월보>에 실은 글로 병원장님(당시 피부과의 김성환 교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이화동이나 명륜동, 이화동 주민들이 매일처럼 오가며 시계탑 침의 움직임을 보며 가슴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었음을 가슴 뿌듯이 갖게 하기도 하여, 마치 O. Henry 저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인 입원환자가 마지막 잎새에 희망을 걸었던 것처럼 이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연건동 주민의 희망이오 활력소가 되리라는 기쁨을 안았던 순진함을 죽어가는 지금도 뿌듯한 쾌거로 상기된다.
7. ‘적십자 정신도 모르느냐’; 박길수 교수(외과학)의 충언
4. 19 의거 당일 오전 우리 실습조( 김광우, 김진락, 김동석, 김용일, 김병수, 김창호)는 일방외과 실습을 돌고 있었는데 다른 대학 학생이 던진 돌아 맞아 피를 흘리며 외과 외래를 찾았고, 5분 뒤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이 경찰관이 휘두른 곤붕에 맞아 머리를 다치고 외과에 와서 박길수 교수의 진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실습조는 순서대로 환자를 예진한다고 하였지만, 경찰관은 우리의 적이고 의거에 참여하다가 다친 학생이 먼저 치료를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마침 그날의 외래진료는 박길수 교수 담당이셨는데 잠시 화장실을 가시기 위해 자리를 뜨셨다가 돌아오면서 우리의 토의 장면을 보고 지나치는 말로 ‘부상자에게는 적군이나 아군이 따로 없으며 오직 이들 모두가 부상지일 뿐일 뿐’이라는 적십자정신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결국 경찰관이 먼저 진료를 받게 되었다. 정말 우리는 지금에 비하여 훨씬 나약한 시설이나 시스템 속에서 공부하였으나 스승의 반듯한 가르침 속에서 오늘의 의사로 자란 후학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8. 4.19와 15회 동기들의 백색 까운 시위
그리고 본과 4학년 때에는 4.19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날 오후 1시 병실 실습을 보이콧하고 시계탑 B강당 (3학년 강의실)에 모여 의과대학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떠나기 전에 일개 조는 병원의 들것(단까)를 병원 당국 모르게 훔쳐 나왔고, 또 다른 일개 조는 흰 가운 팔에 두를 완장 (빨간 적십자 마크를 그린 완장)을 만들었다. 약 120명의 3, 4학년의 학생이 이들 완장을 팔에 감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던 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회백군은 우리보다 먼저(오전) 대학을 빠져나와 부정선거에 항거하고자 국회의사당 앞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다리에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별명에 걸맞은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우리 학년 중 박승균 군을 대표로 5명이 경무대 안으로 들어가서 부상병을 찾았으나 그들 말로는 이미 부평에 있는 121 미군 후송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하며 우리를 몰아냈다. 몰론 경찰관들은 술을 마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들 경찰은 우리를 향하여 총을 겨누면서 ‘가운을 벗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하기를 1시간 정도.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발길을 돌려 중앙청에 도착할 무렵, 십 오륙 명의 구두닦이 학생들이 무기고(지금의 종합청사 자라)에서 총을 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다가 드디어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하나씩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깜작하는 사이에 이러난 일이었다.
당시 우리는 무기고 맞은 편 경기도청(지금은 공원이 되어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에서 대치하면서 돌을 던지고 있다가 쓰러진 구두닦이들 앞으로 가서 출혈을 막고자 가운을 찢어 지혈을 시도하였고, 일부 학생은 지나가는 시발 택시를 잡아 이들을 서울대학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그리고 일부 학생들은 노트를 찢어 ‘피 구함’이라고 혈서를 쓴 뒤에 시발 차 창문에 붙였고, 사람들이 부상한 구두닦이를 따라 서울대학병원으로 따라나섰다. 경찰들이 난사하자 대부분의 서울의대생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조서호텔 앞에 있는 HID 앞으로 갔다가 아무런 덕을 얻지도 못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저녁 7시부터 통행금지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김동익 교수가 병원장이어서 우리를 받아주어 병실에서 잤다. 엊그제 같은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0년 4.19 의거 25기념일 오전 나는 서울의대 의과대학 교무담당 학장보 (지금은 부학장이라고 개칭되었다) 앞으로 온 초청장을 들고 수유리(도봉산 가는 길)에 있는 4.19 기념탑 광장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사진전을 보게 되었다. 서울의대가 가장 앞장서서 거리의 시위에 합류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였건만, 광장에서 개최된 4.19 관련 사진전에는 연세의대 학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프라카드를 들며 시위하는 사진이 크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밑에 쓰인 설명에는 연세의대 학생들이 어느 의대생보다 앞장서서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전시 담당자에게 항의하다가 대학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면서도 묵묵히 인간들의 거짓을 듣고만 있는 도봉산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허공을 맴도는 우리들만의 이야기로 그칠 뿐이다.
9. 강의실에서의 Bed-side Teaching
3학년 임상실습을 받게 되자 당시 수련부장이시던 주근원 교수(비뇨기과학)로부터 침상 옆 가르침육(bed-side teaching)의 중요성을 자주 들었다(Minnesota 계획에 따라 우리 대학 교수들이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온 후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생긴 제도였다고 들었다). ‘환자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이들로부토 배워라’는 현장 실습의 중요성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의사들의 마음씨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은 3학년 후반기 내과 김동익(金東益, 후에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가셨다) 교수로부터 강의를 받을 때였다. 강의 후반 부에 40대의 한 간경변증 환자가 바퀴달린 침대에 누워 강의실로 들어왔다. 김교수는 간경변증에 수반하여 비장 종대와 복수가 생기는 기전을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의사가 환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시범해 보이시면서 의사-환자 관계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실감있게 배웠다. 의과학(medical science)만이 의학의 진수라고 믿었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신 장면을 지금도 잊을
김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