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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김용일의 학창추억

잊혀진 연건동 28번지 (2)

1. 함춘원 숲에서 즐긴 오수(午睡)

  의예과를 끝내고 길 건너 의과대학으로 건너 왔을 때(1957년 4월) 학교 분위기는 정말 썰렁했다. 흰 까운을 입고 병원으로 오고 가는 선배들 틈에 끼여 의예과 시절의 낭만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크다란 눈망울만 초롱초롱한 선배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들 틈에 끼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지났던 본과 1학년이 불현듯 생각난다. 그런 속에서도 함춘 동산의 우거진 소나무나 참나무 그늘 밑에서 오수(낮잠)를 즐기며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스. 케-기’ 를 부르짖으며 한 개라도 더 팔려는 소년의 애처로운 소리, 간혹 창경원에서 날아드는 꿩 나는 소리를 듣던 생각이 날 때는 정말 낭만이 따로 없다고 들 하면서 잠이 들었다(물론 지금은 그 동산이 없어졌다). 특히 Petrous bone 속에 숨어 있는 21개의 구멍 길을 외우라 치면 이 오수처럼 즐거울 때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이 양철러 만든 아이스캐이키 통을 들고 잠 깨우는 소년을 나무라는 친구가 없는 것을 보면 정말 맛보다도 시원한 입안에서 녹아내리며 잠을 깨우던 그 아이스 케이키(아마도 한 개 10 원인 듯싶다) 갇던 낭만이 아직도 의예과 데와느는 또 다른 기븜이기도 했다.

2. 후배의 군기 잡는다고 후배들을 못살게 1년 선배들

  특히 나에게는 본과 2학년 시절은 시련이 한꺼번에 돌려든 시기이도 했다. 1년 선배 (본과 2학년)한테 등굣길에 인사(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생 강실(腔室, 2학년 강의실 옆에 화장실 옆에 있던 조그만한 방으로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었음)로 끌려가 나를 쌀가마니로 뒤집어씌우고는 여러 선배한테서 발길질 당하는 일(일본말로 후구로 다다끼) 등 린치 사건이 매일 한 두건이 터지곤 했다 (그 후 25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선배를 일본의 조기위암 세미나 장에서 알아내고 그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지성인이 모인 의대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우리 Ep 이흐부터는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대 15회 졸업생은 학생 때부터 유난스럽다고 후배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시작하는 첫 시간이 되기 전에 10여명의 친구들은 약리 숲을 가로 질어 2학년 강의실 앞을 지나가는 음대 여학생들을 놀려대는 재미로 일찍들 등교하였고,  그중에는 결혼으로 골인하는 이용노군 같은 couple이 생기기도 하였다.

3. 대강당에서의 희한한 쿼터 시험 치르기와 소위 Honor System

  우리 학급 동료들은 의협심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강하였으며, 특히 돌출적인 행동으로 주변의 교수들이나 선후배들을 놀래게 하거나 주목을 받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본과 1학년으로 올라와 동숭동에서 연건동으로 이사온 시절에 시작한 quarter 시험부터는 본과 2학년 시절 때부터 생긴 오너 시스템(honor rystem)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학 당국은 시험 부정행위 방지를 위하여 2개 학년 학생들을 한꺼번에 대강당에 몰아넣고 한 줄은 1학년 옆줄은 2학년 (나중에는 3학년)을 번갈 앉히고 부정행위를 방지한다는 정책을 폈다. 우리는 이 무례한 정책에 대항 반항하였고, 무언의 저항으로 나는 학생과장실에 끌려가 야단맞기도 했다(실은 나는 1학년 후학기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반회를 열어 나를 학급 대표로 뽑았다. 물론 그 당시의 반대표의 역할은 ‘난로 없는 설렁한 강의실에서의 강의 휴강 시키기’가 주된 임무였다). 이러한 강압적인 시험 치기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수의 감독 없는 정직한 시험을 요구하였고, 급기야 대표 서너 명(최용성 군과 대표 둥 4명이 앞장 섬)을 뽑아 나세진 학장님을 찾아가 ‘깡패 같이 보였던 조교들에 둘려 쌓여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인격 모독임을 주장하고 조교들의 감독을 폐지시켜 줄 것을 설파하려 했다. 당시 강당에는 4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하나의 연결형 책상/의자에 4명의 학생이 앉아서 서로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학교의 이러한 내심은 ‘나는 이 시험을 치름에 있어서 남의 것을 보지도 않았고, 또 남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음을 나의 명예를 걸고 서명한다’고 시험지 첫 장에 싸인을 한 <Honor system> 제도 만들기를 강행하였다. 그랬건만 아래 학년 후배들이 너무 야단스레 한다고 비꼬는 통에 1년 만에 없어졌다.

4. <우리는 감사한다> 비석 세우기

  우리는 서울 청계천 입구에 있던 서린 호텔(지금은 없어짐)에서 졸업 25주년(졸업 후 첫 모임)을 자축하고(회장 : 김용일) 재회의 기회를 가졌다. 졸업 후 많은 친구들을 처음 만나면서 반가움을 나누어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우리 대학 동기회의 첫 문집이 되었다. 그 때 발간한 책 이름이 바로 ‘우리는 감사한다’이었다. 표지는 김진호 동문의 시계탑 그림(수채화)이었는데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 즉 우리는 역사를 창조하지 뒤따르가지 않는다는 말없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책 전반부 1/3은 15회(마침 우리 동기회가 제 15회와 깍 맞추어졌다)에 걸쳐 심영보 동문의 자상한 동기 수상집이 우리의 이 창조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편집위원들이 이에 찬동하여 이 글을 중심으로 책을 편집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국내외 동기들이 보내준 글로 된 수상집이 되었던 바 뒤이은 서울의대 졸업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지금은 많은 동기회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책이 정기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그 책을 보면 제각기 경험한 그리고 우리들까지도 채 몰랐던 이야기로 실려 있어서 회상의 기쁨을 더욱 진하게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우리가 함께 나누어 가졌던 이 ‘우리는 감사한다’ 수상집은 혜화동에 살던 장가용 군 집에서 윤곽을 잡기 시작하였으며, 김용일, 심영보, 김진호, 장가용, 조일균 동문 등이 두 번이나 만나서 편집회의를 가졌다. 그 집은 매우 아담한 집이었으며, 앞쪽은 장군의 부인이 개원했던 윤안과가 있었고 옆과 뒤는 살림집이었다). 장군의 아버지였던 장기려 교수는 부산 복음병원(현재의 고신의대 부속병원) 원장이었으나 워낙 물질사회와는 등진 청렴결백한 분이셔서 모든 살림은 장군의 쥐꼬리만 한 해부학 교수 봉급과 부인의 개원으로 꾸려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책의 뱡향은 우리 동기들의 현 위치와 보람, 그리고 앞을 내다본 임무가 중심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마음속에 심어 있었다. 마침 심영보 동문의 글이 연속으로 의사신문에 연재되어 있는 글을 심형으로부터 얻어서 재미 동기들이나 이를 보지 못한 국내 동기들이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글을 중심으로 편집하되, 모든 동기들이 한 편씩 글을 보내도록 하기로 입을 모았다. (그리고 보니 그 당시 졸업 25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우리를 의사의 길로 가게 해 주신 은사를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으나 제2차 경주 모임에서는 모교방문으로 이 아쉬움을 달랬다).
  이 25주년 기념행사 때의 주제는 당연히 「우리는 감사한다」였고, 25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자랐고 가족이 이렇게 많아졌는가를 서로 알게 되었는가 하면, 재학 당시의 생각이 어떻게 실제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동시에 이 모임이 우리의 보람이 됨은 물론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동기생들의 reunion은 제9회 졸업생(1950, 회장 최진학, 작고)이 먼저 시작하였다). 지금도 연건동 20번지에 남아 있는 우리의 고색창연한 모교(기초의학) 정원에는 숫한 비석이나 동상 등이 서 있거나, 제7회 동기 등 여러 동기들이 심어준 고가의 멋진 소나무 들이 부산에서 실려 왔지만, 이러한 모교 뜰에 무엇인가를 기념비적 뜻을 남긴 효시는 아무래도 우리 15회 동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마련한 사연 많은 ‘우리는 감사한다’라는 알송달송한 이름의 비석이 아닌가 싶다. (자세한 기록은 첫 수상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보낸 멋있는 의과대학 생활을 보낸 흔적은 지금도 (해부학 실습이 이루어졌던 해부-병리학 분실 앞 느티나무 옆 나지막한 동산에 선 채 4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고 서 있고 그 느티나무는 비록 고목이 되었지만 그대로 우리를 맞고 있다.
 
5. 하숙집에서 쫓겨난 이야기

본과 1학년 1학기 때(1957)의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해부학은 의학공부의 밑거름이고 의학용어에 접하는 첫 단계이니 본과 1학년에 진입한 시간부터 학생들의 진을 다 빼놓게 한다. 그 중에서도 두개골 이름외우기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어서 재시험이다 F학점이다 하여 해마다 많은 동료 친구들을 울린다. 외울 것도 많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내이(內耳)를 담고 있는 뼈(petrous bone)는 하도 복잡하여 해부학 책에 실린 그림만으로는 뼈 속에 숨은 21개나 되는 미로의 주행(走行)을 알아맞히기조차 힘들다.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아도 알아듣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해부학교실에서는 두개골 표본을 학생들에게 빌려주지도 않으니 학생들은 선배들로부터 전수(傳受)되어 내려오는 두개골 표본이 제 차례가 되기를 기다릴 수 없어서 아예 다른 의과대학 학생들로부터 남몰래 빌리곤 하였다.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연인(戀人)의 도움으로 나 역시 간신히 다른 의과대학에 다니던 친구가 가진 두개골을 빌렸다. 그리고는 매일 이 해골을 큰 가방에 넣어 등교했다가 학교에서는 개인함에 옮기고 저녁에는 도서관으로 가져와서 공부하였지만, 시험 철이 다가오면서 외워도 잊어버리는 자신이 처량한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또 급하기도 하니 하숙집까지 감추어 가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띠지 않게 보자기를 끌러 옆방의 주인집 식구들이 모르게 두개골 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하숙집 식구들에게 들키지 않을까하고 신경이 쓰여 시험 며칠 전부터는 아예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늦은 밤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에서 해골을 꺼내고는 이불을 뒤집어쓴 뒤 손전등을 켜고 늦게까지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해부학 시험 이틀 전 날 밤 나는 전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개골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 모양이다. 주변이 시끄러워 잠을 깨었는데 어떤 여인의 비명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도둑놈 잡아라.’ 하고 지르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소리였다. 알고 보니 도둑놈이 늦은 밤 하숙집에 들어왔다가 불을 켠 채로 자는 안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내 방문을 열어보았다가 내가 해골을 가슴에 품어 안고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다가 마당에 있는 물통을 엎질러 하숙집 아주머니를 깨웠던 모양이다. 이 소동이 난 지30분 쯤 된 후  아주머니가 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위로해 줄려고 내 방에 들어왔다가 내가 해골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소스라쳐 놀라 다시 소리를 지르며 내 방을 뛰쳐나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하숙집 남편 되는 집주인이 내방을 찾아왔다. 그분의 이야기인 즉 간밤 주인집 아주머니가 내방에 와서 두개골을 보고 간 후 밤새 시름시름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또 자라는 아이들도 있어서 집안에 해골이 있으면 부정을 타니 오늘 중으로 나보고 다른 데로 하숙을 옮겨달라고 하지 않는가.
여하튼 이렇게 해서 나는 문리과대학 의예과에서 의과대학으로 옮겨온 지 두 달 만에 돈암동에 있던 하숙집을 딴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졸업하고 40년이 넘는 지금도 해부학(골학) 생각만 하면 하숙집에서 쫓겨난 생각이 떠오르곤 하여 자다가도 고소(苦笑)를 짓는 통에 이 사정도 모르고 옆에서 곤히 자는 아내를 놀라게 한다.
오늘도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밤을 새는 학생들을 연상하면서 의과대학생들이 이처럼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세상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한다.

6. 시계탑의 침을 돌려라

  본과 3학년 때에는 6.25 이후 오랫동안 멈추어 서있던 시계탑의 침을 돌리는 <함춘월보>에 실은 글로 병원장님(당시 피부과의 김성환 교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이화동이나 명륜동, 이화동 주민들이 매일처럼 오가며 시계탑 침의 움직임을 보며 가슴에 활력소를 불어 넣어주었음을 가슴 뿌듯이 갖게 하기도 하여, 마치 O. Henry 저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인 입원환자가 마지막 잎새에 희망을 걸었던 것처럼 이 돌아가는 시계바늘이 연건동 주민의 희망이오 활력소가 되리라는 기쁨을 안았던 순진함을  죽어가는 지금도 뿌듯한 쾌거로 상기된다.
 
7. ‘적십자 정신도 모르느냐’; 박길수 교수(외과학)의 충언

  4. 19 의거 당일 오전 우리 실습조( 김광우, 김진락, 김동석, 김용일, 김병수, 김창호)는 일방외과 실습을 돌고 있었는데 다른 대학 학생이 던진 돌아 맞아 피를 흘리며 외과 외래를 찾았고, 5분 뒤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이 경찰관이 휘두른 곤붕에 맞아 머리를 다치고 외과에 와서 박길수 교수의 진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실습조는 순서대로 환자를 예진한다고 하였지만, 경찰관은 우리의 적이고 의거에 참여하다가 다친 학생이 먼저 치료를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마침 그날의 외래진료는 박길수 교수 담당이셨는데 잠시 화장실을 가시기 위해 자리를 뜨셨다가 돌아오면서 우리의 토의 장면을 보고 지나치는 말로 ‘부상자에게는 적군이나 아군이 따로 없으며 오직 이들 모두가 부상지일 뿐일 뿐’이라는 적십자정신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결국 경찰관이 먼저 진료를 받게 되었다. 정말 우리는 지금에 비하여 훨씬 나약한 시설이나 시스템 속에서 공부하였으나 스승의 반듯한 가르침 속에서 오늘의 의사로 자란 후학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8. 4.19와 15회 동기들의 백색 까운 시위

  그리고 본과 4학년 때에는  4.19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4.19날 오후 1시 병실 실습을 보이콧하고 시계탑 B강당 (3학년 강의실)에 모여 의과대학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떠나기 전에 일개 조는 병원의 들것(단까)를 병원 당국 모르게 훔쳐 나왔고, 또 다른 일개 조는 흰 가운 팔에 두를 완장 (빨간 적십자 마크를 그린 완장)을 만들었다. 약 120명의 3, 4학년의 학생이 이들 완장을 팔에 감고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하던 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회백군은 우리보다 먼저(오전) 대학을 빠져나와 부정선거에 항거하고자 국회의사당 앞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다리에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일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별명에 걸맞은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우리 학년 중 박승균 군을 대표로 5명이 경무대 안으로 들어가서 부상병을 찾았으나 그들 말로는 이미 부평에 있는 121 미군 후송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하며 우리를 몰아냈다. 몰론 경찰관들은 술을 마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들 경찰은 우리를 향하여 총을 겨누면서 ‘가운을 벗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하기를 1시간 정도.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발길을 돌려 중앙청에 도착할 무렵, 십 오륙 명의 구두닦이 학생들이 무기고(지금의 종합청사 자라)에서 총을 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다가 드디어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고 하나씩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깜작하는 사이에 이러난 일이었다.
  당시 우리는 무기고 맞은 편 경기도청(지금은 공원이 되어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에서 대치하면서 돌을 던지고 있다가 쓰러진 구두닦이들 앞으로 가서 출혈을 막고자 가운을 찢어 지혈을 시도하였고, 일부 학생은 지나가는 시발 택시를 잡아 이들을 서울대학병원으로 실어 보냈다. 그리고 일부 학생들은 노트를 찢어 ‘피 구함’이라고 혈서를 쓴 뒤에 시발 차 창문에 붙였고, 사람들이 부상한 구두닦이를 따라 서울대학병원으로 따라나섰다. 경찰들이 난사하자 대부분의 서울의대생들은 흩어졌고, 일부는 조서호텔 앞에 있는 HID 앞으로 갔다가 아무런 덕을 얻지도 못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저녁 7시부터 통행금지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마침 김동익 교수가 병원장이어서 우리를 받아주어 병실에서 잤다. 엊그제 같은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0년 4.19 의거 25기념일 오전 나는 서울의대 의과대학 교무담당 학장보 (지금은 부학장이라고 개칭되었다) 앞으로 온 초청장을 들고 수유리(도봉산 가는 길)에 있는  4.19 기념탑 광장 기념행사에 참석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사진전을 보게 되었다. 서울의대가 가장 앞장서서 거리의 시위에 합류하고 부정선거를 규탄하였건만, 광장에서 개최된 4.19 관련 사진전에는 연세의대 학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프라카드를 들며 시위하는 사진이 크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밑에 쓰인 설명에는 연세의대 학생들이 어느 의대생보다 앞장서서 백색 가운을 입고 시위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전시 담당자에게 항의하다가 대학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면서도 묵묵히 인간들의 거짓을 듣고만 있는 도봉산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허공을 맴도는 우리들만의 이야기로 그칠 뿐이다. 

9. 강의실에서의 Bed-side Teaching

  3학년 임상실습을 받게 되자 당시 수련부장이시던 주근원 교수(비뇨기과학)로부터 침상 옆 가르침육(bed-side teaching)의 중요성을 자주 들었다(Minnesota 계획에 따라 우리 대학 교수들이 미네소타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연수를 받고 온 후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생긴 제도였다고 들었다). ‘환자를 직접 보고 만지면서 이들로부토 배워라’는 현장 실습의 중요성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의사들의 마음씨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은 3학년 후반기 내과 김동익(金東益, 후에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가셨다) 교수로부터 강의를 받을 때였다. 강의 후반 부에 40대의 한 간경변증 환자가 바퀴달린 침대에 누워 강의실로 들어왔다. 김교수는 간경변증에 수반하여 비장 종대와 복수가 생기는 기전을 가르치셨는데, 우리는 의사가 환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시범해 보이시면서 의사-환자 관계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실감있게 배웠다. 의과학(medical science)만이 의학의 진수라고 믿었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신 장면을 지금도 잊을

김용일
의예과 시절의 낭만 (2)
- 분망한 의예과 시절의 ‘호연지기’ -
김용일

1. 호연지기 기르기

  의예과시절이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름방학을 보냈다. 「큰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의예과시절부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지 않고 언제나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졸자 (拙者) 의사가 된다」고 명의(名醫) 길을 일러준 김명수(金明水) 교수 (시사영어 담당 시간강사)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이영택 교수(의과대학 의사학 교수)가 담당하였던 불어 시간에 자주 들려준 ‘자신을 달래는 길을 찾으리’고 당부하셨던 일 때문인지 친구들이 다양한 방학기간을 보냈던 것은 틀림없다. 오국상(吳國相)군은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졌고 2학기 개강한 지 보름이나 지난 후에 강의실에 모습을 보였다. 강원도 설악산에 어느 절에서 수양(?)을 하고 왔다고 소문이 돌았고, 심영보 김홍덕, 박승균. 박준영, 김진호 군 등 대 여섯이서 팀을 만들어 열흘 넘어 자전거로 남해안을 돌아오는가 하면, 일부 친구는 명동에 있는 <돌채, Dorte의 우리말> 다방 패(커피 한잔을 주문하고는 하루 종일 고전 음악을 감상하는 친구들)는 눈감은 채 어지러운 세상을 보지 않기라도 하듯 컴컴한 음악감상식에서 사색하며 피서법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동석군(출석번호 22번)은 일생 의료의 반주자로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하면서 여름 땀을 닦았다.
  물론 그중에는 여름방학 중이라도 가정교사로 수업료를 마련하는 <부지런 파>도 있긴 해지만 대부분 호연지기를 키운다는 명분으로 무의촌 봉사, 농촌 손 거들기에 나서기도 하였다.

2. 원어 미국교과서 구입으로 혼 난 신요철 군

  그런가 하면 본과 1학년에 배울 Doland's Medical Dectionary, Gray's Anatomty, 해부학 Atlas, 생화학, Zinser 의 미생물학, Anderson 병리학, 생리학 등 영문판 교과서를 주문하기 위하여 호주머니를 털어 신요철 학급대표에게 막겼고, 그는 사명감 하나로 동분서주하였지만 결국 돈을 떼이게 되는 상황에까지 몰려 ‘내가 집접 오 사장을 만났다’고 학년회의에서 신상 발언하는 통에 우리는 신군에게 ‘직접 만나라’라는 별명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결국 박승균 대표가 가세하여 상당수의 책(일부는 책값)은 얻어냈으나 일부는 받지 못하거나 책값을 되돌려 받는 등, 일종의 사기에 휘말려 학급 동료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당시의 대표들의 체중은 몇 kg 쯤은 감소하였으리라. 그래도 대충 마무리되는 기쁨을 안았다.

3. 서울 출신 동료들의 교양자질 부족 탓에 기죽어 지낸 지방 촌놈들

  우리 학급은 유난스럽게 의예과 생활, 아니 자유분방한 의과대학 생활을 보냈다. 술에 취하여 동숭동 문리과대학과 연건동 의과대학과 사이에 있던 5m 미만의 시냇물에 빠져 건져 올린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오전에만 수업이 있는 날의 오후는 명동에 있던 돌체(Dorte)라는 컴컴한 음악실 소파에 파묻혀 고전음악에 심취하던 친구들도 있었다.
  대구에서 갓 올라온 촌놈이었던 나는 미술, 음악 이야기만 나오면 서울 출신 급우들(경기, 경복, 서울고 출신) 동기들의 놀림 때문에 기가 죽어 지난 끝에 한 학기마다 한번씩 2년 동안 하숙집 room mate를 바꾸어 교양 부족을 만회하고자 하였지만 이 시도는 수박 겉핥기식의 미련만 남기고 끝났지만 자존심 살리기에는 충분했다. 이 덕택에 영어 소설도 제법 읽고, 서투른 불어공부도 하였지만, 그리고 고전음악도 잘 알지 못한다는 놀림을 극복하고자 혼자서 여러 번 돌체 다방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반년이 지나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곁에서 이를 본 음성 출신 권순홍 군은 딱해 하면서 나를 문리대 정구장 옆에 있던 학생회관(단층 4각형의 넓은 방)으로 끌고 가서 개인 바둑 수업을 맡아주기도 했지만 세 번 만에 그를 실망시킨 때도 있었다. 당시 이 학생회관에는 차를 마시며 마로니에 나무를 감상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많은 친구들은 바둑이나 정구를 즐겼다. 물론 의예과 생활 중에는 서울이라는 객지에서 겪는 대학생활의 어려움 이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사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우리를 슬프게 한 부산 출신 친구도 있긴 했지만.
  그런가 하면 일부는 세느강이라고 부르던 대학천(일명 이화천) 건너에 있던 중앙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밤  늦게까지 사전을 펴가면서 괴테의 제자가 썼다는 “Gesprach mit Goethe"를 번역하느라고 씨름하였고, 문학소년이리거 놀림을 받던 서휘열군(전주 출신)이나 김우곤 군(진주 출신)은 나와 함께 나쯔메 쇼세끼 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벗짱(소년)을 돌려가면서 일본 소설책을 읽곤 하였으며, 아니면 독일어 실력을 쌓는다고 Faust 문장을 외우기도 하였다. 이런 것만이 서울 촌놈이라는 별명을 따돌리는 길이라고 하면서....

4. 김광우 군 귀향을 핑계대고 술 마시다가 경찰서로 잡혀간 사연

  1955년 12월 22일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15회 동기생인 이 괴짜 동기들은 의예과 2학년 학년말 시험을 치르고 부산으로 귀향하는 김광우 군을 환송한다는 명분 아닌 명분을 만들어 12명이 안국동 길 몫에 있던 단층 막걸리 집에서 에 있는 음식점에서 학년 말 시험을 끝낸 속 시원한 기분을 풀었다. 통금시간이 다가와도 일어설 줄 모르고 12시 직전에야 겨우 일어섰다. (그때만 해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어서 12시 5분정에 예비 사이렌이 울고, 12시에 또 한 번 울은 후 모든 행인들은 모두 경찰서로 잡혀가서 하루 밤을 자고 나야 했다). 우리는 예비 싸일렌 소리를 듣고서야 일어섰으나 갈 곳이 마땅치 않자 모두들 덕성여고를 지는 골목을 따라 화동 1번지에 있는 경기중학 부근에 있던 이제두군 집으로 도망치듯 달려갔지만, 결국 무두가 경기중학 정문에서 경찰관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5분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 스리 쿼터(지금의 봉고 같은 미군 군용차 개조한 것)에 실려 종로경찰서로 끌려가서 하루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처음 우리를 취조한 경찰관도 기가 찬 모양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들이 만취가 되어 허턴 소리를’ 하는 애숭이 학생임을 알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들이 술이 취해 건더런 거린다며 벌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다행이도 우리를 인계받은 경찰관은 ‘서울의대를 다니는 학생’이라는 배려로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어 우리는 난로 가에서 좀도둑을 취조하는 구경을 보는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마침 그 날이 동지였는데 밤이 그렇게 긴 줄을 처음 알았던 우리는 동지의 뜻을 톡톡히 경험하였고, 새벽 4시에 풀려나지 곧 오원환군 집이 있던 당주동 부근 청진동 설렁탕집으로 몰려가 해장국을 한 그릇씩 말아먹고는 헤어진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앞서 떠난 김광우군은 새벽차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머리에 떠오른다.


    
의예과 시절의 낭만 (1)
김 용 일

  이야기의 순서가 의예과생활과 본과의 일들이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정리될 기회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자 앞으로 2회에 걸쳐 우리들의 머리에 남아 있는 의예과 생활 몇 가지를 2회로 추려 동기들의 옛 추억을 자극한 후에 연건동 28번지로 뒤돌아가서 더 재미있는 회고담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1. 교수 길 들이기와 동도극장의 조조활인
  우리가 의예과에 다니던 1955(입학)-1961(수료)년대에는 어느 의과대학(당시 전국에는 8개 의과대학이 있었다) 할 것 없이 전임교수에 비하여 시간 강사나 조교급 대학원생들이 학생강의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1955년에 입학한 우리 학급(요즘 학생들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55학번이었다)도 예외가 아니어서 외래교수가 50% 이상의 수업(강의나 실습)을 담당하였으며, 그 중에는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도 계셨지만 우리들 사이에 악명 높은 교수도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한 분이 바로 서울 모 명문 대학교  생물학과의 박상윤 교수사 아닌 듯싶다. 그분은 우리들의 동물학 강의를 담당하였는데 한 학기 내내 매 시간마다 15 - 20분 늦게 강의실에 들어와서 정시보다 10분 일찍 끝내는 반쪽짜리 강의를 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그 분의 버릇이 된 듯하여 우리의 속을 썩이곤 했다.
  1956년 의예과 2학년 2학기(초겨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침 9시부터 동물학 강의가 시작되어야 할 시간인데도 15분이 지나도록 교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교수의 지각은 유난하여 늘 이 모양이니 하고 20분이 지나도록 마냥 기다렸으나 교수가 나타나지 않자, 화가 난 동료들 중 (고) 강영호군(지방 출신 동기들의 대표자격을 맡았음)이 늘 선동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수 특히 자연과학계 교수가 수업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우리를 K대학 학생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학문하는 자세도 모르는 모양이라면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 그러니 이런 분이 우리의 강의를 맡을만한 mentor이 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며 ‘자진해서 출강을 중단할 것을 권한다’는 극한적인 말로 학과 분위기가 형성되어 갔고, 어떤 친구는 ‘우리가 당신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는가 하고 맞장구를 치기 시작하였고, 일부 동료는 매번 20분이나 지각하며 강의실에 나타나는 마음가짐은 우리의 <척결 제1호>라고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그 교수를 몰아붙였다 (물론 그 강사가 그 자리에 없기는 했지만). 그 결과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동물학 수업을 집단 보이콧하여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를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칠판에 ‘수업은 9시부터이니 제시간에 나오십시오. 의예과 2학년 학생 일동‘ 이라고 크게 썼고, 학생 전원이 강의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런데 마침 法大 쪽에서 문리대쪽으로 건너오는 구름다리를 타고 그 P교수가 건너오지 않는가.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현장을 도망쳐 나왔는데 누군가가 ‘조조할인 하는 동도극장으로’ 라고 외치면서 앞서나갔다. 실상 극장 입장료는 오전에는 조조할인이 되었고, 영화 이름은 「외인부대」라는 프랑스 영화이었다. 물론 우리말 자막이 나왔지만 일부 프랑스어에 열의를 보였던 친구 말고는 몇 마디만이라도 알아듣고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내가 알아들은 것으로는 오직 ‘Je si ne pa(I don't know)' 뿐이었다. 물론 마음을 졸였던 친구들은 다음 시간에 P 교수로부터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게 생각하였지만,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여하튼 P교수의 지각 덕에 동도극장의 조조할인 영화를 보게 되었으나 그분의 수업 지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2. ‘Fuzzy’라는 단어에 얽힌 이야기
  의예과는 정말 우리가 고등학고 생활에서 풀려나 소위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기기를 바라던 때의 일이다. 얌전한 친구들은 말쑥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창도 없는 빵떡 교모를 뒤집어쓰고 동숭동 문리대 건물 맨 뒤 언덕에 위치한 단층 건물에서 겨울을 지나야 했으나 난로도 없던 시절의 배움이 불쑥 생각난다.
  의예과 1,2 학년 때 우리는 매 학기 하나 또는 두 개의 영어강좌를 들었다. 그 중 하나는 미국계 한국인 교수인 Mrs. Maria Kim(하와이 거주 한국계 미국인)의 영어회화이었고, 또 하나는 시사영어(時事英語)라는 교과목 이름으로 수업을 담당하였던 김명수 교수의 강의였고 희극배우처럼 웃기고는 끝나는 수업도 있었다. 물론 2학년 때에는 박00 교수님의 자기도취형 영문학 수업 (주로 John Keatz나 Wordworth의 영미 시문학),  아니면 늘 술에 취한 듯 한 뻘건 얼굴로 비뚤어진 사회상을 빈정거리는 투로 야유 하시던 한00 시간강사(오랫동안 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을 하셨던 한상태 박사님의 아버지임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내노라 하는 동기들이었던 의예과 학생들의 수업 열의는 대단하야 문리대 학생들과는 판이하였다.
  그 중에서도 키가 자그만 했던 Maria Kim 선생님의 영어회화는 나에게는 잊혀 지기 어려운 추억을 남겼다. 우리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시는지라 언제나 영어로만 강의하시는 하와이 거주 한국인이었는데, 어느 날 Maira Kim 선생님의 강의 중에 fuzzy 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아무도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자, 한참 강의실 내의 학생들을 둘러보다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나의 머리를 가리켰다. 새둥지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조차 하지 않고 앉아있는 머리모습이 바로 fuzzy(헝클어진 이라는 형용사)라고 이야기하자 동기생들은 와 하고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그 후 나는 다시 그 단어는 잊지 않게 되었지만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여 그날로 구내 이발관에서 중대가리처럼 밀어버렸다.
  유홍렬 교수 (당시 의예과 부장, 소아과 고광욱 교수의 장인이었음)의 세계문화사는 10년쯤 묵은 누른 공책을 늘 들고 오셔서 비판력이 부족한 우리의 학습태도를 꾸중하시던 분위기기, 양주동 교수의 수제자임을 자처하던 동국대학교 국문학 교수이었던 양00교수(?)의 고전 국문학 시간은 아예 양주동 예찬론으로 일관했던 생각이 난다. 머리에 남은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것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독문학은 허형근(許亨根) 교수의 교육용 교재는 유인물이었으나 정성을 드려 St. Domingo 섬의 수도원 이야기, ‘Gesprach mit Goethe’를 강독하셨던 독문과 이희영(李檜榮) 교수로부터는 예습하지 않았다고 혼내주시던 독일어 시간에는 모두들 책상에 엎드려 책을 읽는 채하며 교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지만 유독 최규완 군을 비롯한 몇몇 동료만은 열성이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철학강의 (미술대학 미학과 박의식 교수)의 야유 섞인 강의, 재시험을 일삼아 즐기던 추계학(推計學) 강의를 맡으셨던 수학과의 최지훈 전임강사(사학과 최윤식 교수의 아들), 체육학 교수였지만 국문학으로 일가견을 펴셨던 강원도 출신의 문영현(文榮鉉) 교수의 구수한 농담이 그립다.
  학생들이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심리학교육을 맡으신 윤태림(尹泰林) 교수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강의가 아닌가 싶다. 늘 미군 교재용 TM book의 일종인 Living Psychology를 들고 강의실로 오셔서 유머가 섞인 강의로 우리를 즐겁게 하시면서 실제 심리학의 응용을 풀어가셨다. 그 중에 ‘방문자가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왔다고 해서 바로 응접실로 나가지 말고, 15분쯤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하라. 그 사이 방문객은 방문 사유를 요약할 것이고 나의 시간을 뺏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으셨다(그 후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옮기셨다).

3. 문리대 운동회
  초여름 우리는 매년 소위 물리대 운동회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앉을 자리는 문리대 어느 팀과는 섞이지 않고 일년 선배였던 악동들의 압력에 의해서 따로 움지기었다.  
잊혀진 연건동 28번지(3)

김용일 작성




1.쿼터시험 단상(斷想)

  우리가 본과 1학년으로 진급한 1957년부터 '쿼터(quarter)시험'이라고 붙여진 시험이 우리나라 대학에 처음 생겼고 지금은 각 대학마다 중간고사라는 이름으로 통칭되고 있다. 당초에는 전국의 각 대학마다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교육계획을 운영하였으나, 서울의대(당시 학장: 명주완 교수)는 1957년 우리 학년부터 각 학기를 다시 2개 분기(分期)로 쪼개어 학과목마다 아니면 교육목적에 따라 수업기간을 융통성 있게 편성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억지로 학기제를 운영하는 통에 8주 만으로도 될 수업을 학기말(16주)까지 끌고 가는 대신, 매 학기마다 8주제를 운영하는 4분기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우리 서울의대 15회 졸업생들이 의예과로부터 1957년에 의과대학으로 진학하던 때부터 처음으로 시도 되었는데, 이는 서울의대 자문관으로 와 있던 미네소타 의대 Gault 교수의 아이디어를 받아드렸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비단 이러한 교육기간의 재조정이라든지 IDL (Inter-Departmental Lecture)계획의 도입은 단순히 수업기간 조정에 거치지 않고 그 후에도 한참 계속되었다가 1971년부터 시작한 통합교육제도(Integrated curriculum, 당시 block lecture라고 불림), 필수-선택과목의 구분, 학습의 강의 중심제도에서 실습 강화로의 이동, 임상의학에의 조기 노출과 기간 연장 등의 획기적인 교육계획(당시 권이혁 학장)이 연이어 뒤따랐으니, 서울의대 15회는 우리나라 근대화 의학교육의 시발점이 되었고, 뒤 있는 졸업시험의 개선(임상의학 종합평가)은 자료 제시형 출제라든지 사례문항 출제는 이 나라 의사국가시험 개선의 효시 역할을 담당하였다. 




2. 희한한 아이디어의 시험좌석 배치

  대학당국은 학생들의 부정행위를 막는다는 이유로 몇가지 희한한 아이디어를 도입하였다. 그 첫째가 강당에 2개 학년을 집어넣고, 4명이 한 줄로 앉도록 하여 부정행위를 막았다. 첫 해는 1학년과 2학년이 교대(1,2,1,2 학년)로 앉게 하여 부정해위를 막고자 하였으나(교무과장 : 박진영 미생물학 교수), 여의치 않은 듯, 2학년 2학기말 시험 때에는 1학년, 3학년 순으로 앉게 하였다. 첫 시도는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2학년 학생이 1학년 학생에게 답을 가르쳐준다는 이유로, 그리고 두 번째 시도는 1학년생이 3학년생 사이에 끼어 좌우의 선배들 답 심부름을 해준다는 이유로, 더 이상 연속되지 못하였다.




3. Honor System이 생긴 연유

  예과에서 본과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우리가 1학년 후학기가 되자 깡패처럼 보이는 7, 8명의 험상궂은, 덩치 큰 조교들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와서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협박하면서 얼음 짱을 놓으면서 시험을 치렀는데, 마치 형무소 간수들에 둘러싸인 죄수들처럼 감시를 받으면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공포분위기였다. 어떤 과목에서는 아예 9장의 백지를 주고, 조교수급 교수가 시험장에 들어와서 호주머니에서 출제교수마다 하나씩의 봉투를 꺼내서 그 속에서 들어 있는 시험문항을 흑판에  옮겨쓰고 나가면, 그 다음부터는 조교들의 횡포가 판치는 판국이었다. 마침 학년 대표를 맡았던 나는 재시험 학생 수 줄이기 로비를 하는 일과 휴강시키는 일이 주된 임무였는지라, 시험이 끝나고는 수장급인 조교에게 불려가서 시험태도가 나쁘다고 야단맞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매 쿼터마다 당하는 이 꼴에 속상해 하던 나에게 새 분위기를 선사한 것이 최용성 군을 선봉으로 한 몇몇 동료들이었다. 나는 그들엥 밀려 학장실에 가서 조교들의 부당한 고자세레 대해 항의를 하였다.

  '학장님, 이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시험을 치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둑놈이 아니라 양심껏 시험을 치르는 순진한 학생이니 시험 감독을 면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소연을 드렸다. 그리고 승낙을 받아낸 것이 무감독 시험이었다. 우리는 시험지 맨 첫 장에 '나는 이 시험을 치름에 있어서 남의 답안지를 보지 않았고, 또 남의 것도 보지 않았음을 서약합니다.'라고 자필로 쓰고 그 뒤에 서명을 하였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시험장을 나왔다. 그러나 이 무용담이 학내에 퍼지자 Dr. Gault가 우리를 불러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사실 이 제도는 우리가 처음 창시한 것이 아니라 미국 육군사관학교 (West Point)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신사도(gentlemanship)이며 'Honor System'이라고 불렀다'고 일러주면서도 우리의 용감함을 칭찬해 주었다. 반면 우리보다 한 학년 밑이었던 학생들은 이런 것을 자랑이라고 .... 운운하면서 빙정 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인지 2년 만에 사라졌다.

3. 오국상 군의 Quarter Rhinitis

  의과대학으로 옮겨오자 시작된 것이 쿼터시험이었다. 매년 1쿼터시험 1주일쯤 전부터 오국상 군은 영락없이 강의 도중에 수없이 재채기를 하고 코를 풀었다. 그리고 이 재채기는 쿼터시험이 끝나면 영낙없이 멈추었다. 하도 신기해서 우리는 1 쿼터 시험만 되면 체재기를 한다는 관찰을 바탕으로 '시험 알레르기(test rhinitis)'라고 놀려댔다.

  그러다가 4학년 때 강석영 교수(알러지학 전공)로부터 꽃가루가 allergen이 되어 rhinitis를 일으키고 재채기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우리는 오국상군의 재채기가 시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1쿼터 1주전부터 시작하는 교정에 핀 라일락 꽃가루(pollen)에 의한 비염인 것을 알게 되었rhm\, 이름도 'Lilac rhinitis'로 바뀌었다.


4. 외부 자매병원에서의 임상실습과 Intracondication

  우리들이 3학년으로 진급하자 외부 임상실습이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서울 시내 적십자병원(서대문), 경전병원(지금의 한일병원, 소공동), 국립의료원 실습(을지로 5가)을 택일하게 되었다. 어느 초여름 어느 날 우리는 경전병원(京電病院) 내과 실습을 마치고 이재문 선생(우리보다 4년 선배, 한 쪽 다리가 불편하심)으로부터 취조형 구두시문을 받게 되었다. 그 선배 선생님은 대뜸 나에게 'Peptic ulcer 치료의 intracondication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같은 실습조에 속했던 김광우, 김진락, 김동석, 김창호, 김병수 군 등 역시 꿀 먹은 벙어리로 눈망울만 굴렸다. 여하튼 우리는 이 선생님으로부터 이것도 모른다고 실컷 야단을 맞은 후, 오후 강의를 듣기 위하여 전철로 연건동 학교로 되돌아 왔다. 오는 도중 뒷통수를 맞았다는 억울함을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질문 하나가 있었다. Contraindication이라는 단어에 이상이 있다고 말이다. 그제서야 다들 contraindication을 intracondication이라고 잘 못 이야기한 것에 동의하고 전철 속이 터지라고 웃었으나 승객들은 그 내막도 모르고 우리를 미친 학생 취급을 했다.


5. Student CPC 주관하다.

  미국 Boston에 있는 MGH(Harvard Medical School의 임상실습 담당 병원중의 하나)에서는 매주 CPC를 하고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게재되는데 매우 인기 있는 case record로 알려져 있다. 이 사례 토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Harvarad 의과대학 임상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먼저 이 사례에 대해 미리 예비 토의를 하고 그 후 임상과 교수들이 토의한다는 것을 안 최용성 군 이외의 몇몇 동료들이 주동이 되어 우리들부터라도 하자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미국이라고 해서, 아니 하버-드라고 해서 마냥 까무러칠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은 우리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면서 멋진 도전장을 던졌다. 어떻게 된 심판인지 두어 번 하고는 멎었지만, 당시의 말대로 하면 hepatomegaly가 이만 저만이 아닌 후배들이라고 선배들은 비양그림을 받았다.


6. 넥타이 공장과 서울 엿치기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예방의학 야외 실습이었는데 그중에는 넥타이 공장 견학과 뚝섬 입구의 하수 종말 처리장 관람을 잊을 수 없다(맥주공장 견학은 1970년대에 추가되었다).

  6-1) 서울 엿치기의 사기성에 속다

어느 봄날 우리는 전철을 타고 독립문에서 내려 무악재를 넘어 서대문 형무소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인솔자였던 조교는 우리에게 그저 '넥타이 공장' 구경을 간다고만 안내해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나도 넥타이 공장과 예방의학 실습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오후의 실습에 잔뜩 기대를 걸면서 길을 떠났다. 서대문 밖 독립문에서 내려 서대문 형무소로 가던 중 리야까를 끌고 가는 엿장수를 만났다. 함께 갔던 오원환, 이재두, 김동석, 오국상 그리고 내가 함께 가다가 이제두 군 악동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늘 재치 만점이던 이제두군의 제안으로 엿치기를 하게 되었다. 각자 10원씩 하는 엿치기를 하게 되었는데, 당연히 내가 구멍이 가장 많고 큰 것을 보였고, 누군지 몰라도(오원환군?) 구멍이 거의 없는 충실성 엿 단면을 보였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꼴지 친구에게 나를 닮으라고 말하기 무섭게 이제두 군이 대뜸 '이 친구 엿치기도 모르네. 서울 엿치는 구멍이 제일 많은 친구가 돈을 내게 되어 있지'하며 막 무가네였다. 그래서 나는 또 한 번 어수룩한 촌놈 행세를 하게 되었다. 졸업 후 내가 이제두 군 결혼 전날 함재비를 하였는데, 처가댁(장인은 단국대학교 학장이셨다)에서 '함 팔이'를 하려다가 이제두군 부인의 꾀임에 넘어가 결국 제대로 함 값을 갖지 못하고 들어가서, 서울 엿치기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식 함재비를 하면서 웃어넘긴 적이 있다.

  6-2 넥타이 공장이 무엇이지?

  당시의 인솔 조교는 예방의학교실의 조교였던 허정(許程) 선생이었다. 안내를 맡은 간수 하나가 우리를 사형장으로 안내하였는데, 일제 시에는 주로 항일투사들을 가두어 두었지만, 독립투사를 어제 바로 이 장소에서 당시 간첩으로 몰린 허00 대령과 김00하사가 교살(목매어 죽임)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왜 넥타이 공장이지 라고 질문을 던진 친구d,; 넥타이를 잡아끌고는 바로 목을 매는 새끼줄이란 말이야 하고 핀잔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