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승아;

   마포 새우젓이라고 없임받든 나와 청량리 똥파리라고 놀림받든 네가 맞난 해는 해방된지 2년 후인 1947년이었다. 수재만이 모였다고 듣든 학교이기에 누구나 수재였다만 너는 수재중의 수재였다. 특히 어학에 뛰어났었다. 학병으로 나가 일본 히로시마에 있다가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도 살아나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 생각 나냐? Thomas Hardy의 Tess of the D'Urberville 을 교재로 영어를 가르치든 그가 어느날 여러분들은(그렇다 그는 우리들을 너희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러분들이라고 불렀다) 지나가는 여학생의 스커트가 천사의 옷자락으로 비칠날이 곧 올것이라고 하든 그 다정 다감 하든 선생 말이다. (소문에 의하면 이 선생은 동란중 그가 이끌든 소대가 인민군에게 포위되자 대원들에게 어떻게 할것인가 물은것이 화근이 되어 즉결 총살 당했다고 한다).
  
   이 영어 선생이 하루는 (삼학년 때가 아닌가 한다 ) 수업끝에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였다" 를 영어로 표현 할수 있는 사람 앞에 나와 칠판에 써보라는 것이었다. 아마 Tess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 같다. 그래 내가 손을 들고 나가 "He is not who was" 리고 썼다. 칱판을 쳐다보든 선생이 "오늘은 이회백에게 박수를" 하고는 수업을 마쳤다. 내가 으쓱했든건 불문가지다. 그런데 교실을 나서는 나에게 네가 닥아와 "너 틀렸어"하고 찬물을 끼얹었다. "He is not WHAT he was 해야 맞지" 하는 것이었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된 내가 반론을 펼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짰지만 별 도리가 없어 손을 들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후 김동인의 작품이 화제에 올라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그의 작품 "젊은 그들"을 너는 영어로 뭐라고 할것이냐고 내게 물었다. "Young They" 문자 그대로의 내 "직역"을 듣자 그럴줄 알았다는듯 금방 "They, The Young 으로 하는게 가장 합당해" 하는 것이였다.

   아마 너는 기억치 못할꺼다. 너로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였을테니까. 그러나 나로선 대단한 일이여서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영어뿐만 아니라 너는 독일어도 능통했다. Goethe 의 Faust 를 들고 읽고 있는 너를 본 적이 있다.

   그뿐인가? 너는 음악에도 재주가 비상해 특히 violin을 잘 켜서 삼년전 네 집을 방문했을때는 나를 위하여 여러 아름다운 곡을 연주해 나를 즐겁게 해준 너였다. 그게 네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들려준 곡이 되고 말았구나. 이 세상에서는.

   너와 나느 또 무슨 인연이었는지 똑 같이 고등학교를 2년 늦게 졸업했다. 육이오 덕분에. 또 같은 예과를 들어갔고 대학도 같이 졸업했다. 서로 짠적도 없는데, 나는 의사란 직업에 대해 별로 매력을 느낀적이 없고 의사에 대한 존경심이 별로 없다. 의사이면서도 정치가로 크게 활약한 손문, 아옌데, 서재필 같은 사람은 예외지만.  그런 내가 의과를 택한 이유는 별게 아니다. 일사후퇴때 행방불명된 우리 어머니가 너는 의사가 되어 내 병 고쳐주렴 하시든 우리 어머니의 생전 소원에 따랐다고 할까? 네게 물어본적이 없어 네가 왜 의과를 택했는지 알길이 없으나. 나와는 달리 어떤 확신이 있었을꺼라 짐작된다. 네 부친께서 하시든 시계포에서 부친을 도와 시계를 고쳐본 경험을 네가 이야기 한적이 여러번 있다. 정교한 시계를 수리하면서 더 고도의 기계인 인체를 고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너와나는 육년이란 긴 세월을 한 대학에서 같이 지냈다. 문리대 예과에 다닐때 출중한 해군 장교 였든 네 형 덕택에 네 여동생 승애(후에 이화대학 물리학 교수가 된) 와 같이 진해 해군 사관 학교에 가서 논것 생각 나지? 내가 멋도 모르고 다이빙이 거저먹기인줄 알고 높은데서 뛰어내리다가 겁이나 주저 하는 바람에 수면과 평행으로 떨어져 혼이 난 일. 하루종일 햇볓에 등이 타서 물집이 생기고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된것을 코데인을 구해와 살려준 일.

   졸업후 너는 해군복무후 곧장 미국으로 왔지만 나는 국내에서 수련을 마쳤다. 아무 일이 없었드라면 너와 나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살았을꺼다. 그런데 또 무슨 팔자였는지 이상한 일이 벌어져 나는 미국에 올수 밖에 없었고 너와 나는 다시 가까히 지나게 되었다.                                                                                                            
    너와  나의 공통되는 성격중의 하나는 여간해서는 자기 사정을 남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미국 올때 시카고에 들려 너를 맞날려고 했는데 너무 늦게 알리는 바람에 너는 모르고 출타, 못 맞났든 것이 하나의 예고 매년 오든 크리스마스 카드가 오지 않아 궁금해하면서도 네게 묻지 않아 그 다음해에 가서야 네가  심장수술 받느라고 그랬다는것을 알게 된것이 다른 예이다.
 
   너에 대해 "그 친구 동창회에도 통 안나타 나고 맞나기 아주 힘들어" 이런 소리 심심치 않게 들게되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 너는 몸이 호리호리 하고 담배도 안피우고 술도 안하니 누가 그런아유가 있는줄 알았겠어. 나도 삼년전에 네 X-ray 보고 서야  어떤 정도임을 알수 있었으니 말이다.

   작년에 재 심장수술 결정이 되어 수술방 까지 갔다가 최후 순간에 중지 결정이 되어 나왔다가 또 장에 이상이 있음이 발견되어 장수술 까지 받았노라는 깨알같이 쓴 장문의 네 카드를 받았을때 읽는 내가 괴로웠다. 형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문의편지를 힘들게쓰지 않을수 없도록 만든게 내가 아닌가 해서. 더구나 네 처까지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했으니. 그래서 그후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 나는 삼십이년 이상 살든 집을 떠나 이곳에 왔고  너는 칠십평생 살든 이 곳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맞나리라. 항상 그랬듯이. 다시 맞나거든 더 가까히 지나자. 그리고 더 재미있는 이야기 기이--ㄹ게 나누자. 그날 까지 잘 있거라 광승아. 

   너의 영원한 벗 회백이

   참 부탁이  있는걸 잊었다. 아름다운곡 많이 연습해 두었다가 맞나는 날 들려다오.

이 회백

서휘열 동기가 신광성형의 서거에 대하여 간단한 우리의 마음을 표하는 글을 영문으로 써서 메일로 보네고 여기에도 추가로
발표 하였습니다. (Home Page) 신형의 유해는 카리포르니아 에 있는 아들 존 (John) 의 집 가까이 모시게 되었고 내일 장지에가서 마지막 메장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휘열형이 신형의 부인에게서 허가를 받고 그 존군의 연락처를 얻었습니다.  아래:

시일:  시월 팔일 금요일 열두시 정오
장지:  Mt. Tamalpais,
         2500 5 th ave.St. Rasael, CCA 94901
연락   Mr. John Shin, 415-847-2645

카르포르니아에 사는 동기들에게 장지에 갈수가 있으면 마지막 조의를 표하는 것을 종용 하였습니다.